2026년 6월 4일 (4)
은행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데스크 창]

은행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데스크 창]

승인 2026-05-14 10:14:16 수정 2026-05-14 14:19:15

조계원 경제부장
조계원 경제부장
최근 정부의 금융권 압박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대통령실은 연일 “잔인한 금융”이라고 언급하며 은행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은행을 ‘준공공기관’에 가까운 존재로 규정하며 과도한 이자이익에 안주하지 말고, 서민금융과 중·저신용자 지원, 채무조정 등 공적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은행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은행은 일반 제조업 기업과 다르다. 정부 인가를 받아야 영업할 수 있고, 예금보험제도와 중앙은행 유동성 지원이라는 강력한 안전망 아래 존재한다. 위기 때마다 정부가 금융 시스템 안정을 이유로 개입해온 것도 사실이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한국 사회는 이미 ‘은행은 쉽게 망하게 둘 수 없는 산업’이라는 현실을 경험했다.

문제는 은행을 공적 기관처럼 바라보기 시작할 때 발생하는 구조적 딜레마다. 공공성을 요구하는 순간, 결국 은행이 위기에 빠졌을 때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 역시 함께 따라붙는다. 이는 사실상 국민 세금으로 금융 시스템을 떠받치겠다는 암묵적 약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은행 입장에서도 왜곡된 유인이 생길 수 있다. 위기 상황이 오더라도 결국 정부가 개입할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되면, 금융산업 특유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가능성이 커진다. 민간 기업이지만 사실상 국가가 최종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구조가 고착되면, 은행은 리스크 관리와 혁신보다 정책 순응에 익숙해질 여지가 있다.

더 우려스러운 지점은 정치와 금융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 부양이나 서민 지원 필요성이 커질 때마다 정부가 은행을 사실상의 정책 집행 수단처럼 활용하려 들 가능성도 커진다. 실제로 최근 금융권에서는 중·저신용자 대출 확대, 취약차주 지원, 금리 인하 압박 등이 동시에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은 이를 ‘상생금융’이라고 부르지만, 시장에서는 사실상의 준조세 부담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물론 은행권 역시 자성이 필요하다. 그동안 과점 구조 속에서 안정적인 이익을 누려왔고, 고금리 국면에서는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다. 사회적 비판이 커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다만 은행을 사실상 공공기관처럼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금융산업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에는 공공기관만의 운영 원리가 있다. 수익성보다 정책 목표가 우선되고, 필요할 경우 정부 재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지금의 흐름은 민간과 공공의 경계 어딘가에 애매하게 걸쳐 있다. 평상시에는 민간 금융회사처럼 경쟁을 요구받지만, 상황에 따라 공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압박을 받고, 위기 시에는 국가 개입 가능성이 열려 있는 구조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형태의 혼합 모델일 수 있다.

특히 은행 산업이 현재 높은 수익성을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그 미래는 생각보다 불투명하다. 플랫폼 금융 확산과 인공지능(AI) 기반 금융 혁신은 기존 은행의 역할 자체를 흔들고 있다. 과거처럼 예대마진 중심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구조가 유지될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빅테크와 핀테크 기업들은 이미 송금·결제·대출·자산관리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미래에는 은행 계좌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공공성은 언제나 비용을 동반한다. 금융도 예외는 아니다. 은행에 더 많은 공적 역할을 요구한다면 국민 역시 그 이면의 책임과 잠재적 부담까지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공짜처럼 보이지만 그 청구서가 날아올 시점은 그리 멀지 않을 수 있다.
조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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