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개인 투자자 존(John)은 최근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인터랙티브 브로커스(IBKR)’ 앱을 켜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식을 매수했다. 이전처럼 한국 금융당국에 투자 등록을 하거나 복잡한 서류를 제출하는 번거로움은 없었다. 존이 앱에서 클릭 몇 번으로 넣은 주문은 글로벌 브로커의 ‘외국인 통합계좌(Omnibus Account)’를 거쳐 삼성증권 시스템을 타고 한국 거래소에서 즉시 체결됐다.
멀게만 느껴졌던 ‘한국 주식 직구’ 시나리오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1992년 외국인의 국내주식 직접 투자 허용 등 시장 개방 이후 30여 년간 한국 증시를 에워싸고 있던 ‘폐쇄적 인프라’라는 철옹성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등록제(IRC) 폐지부터 옴니버스 계좌 확대, 외환시장 개방까지 한국 자본시장이 글로벌 투자자 유치를 위해 ‘시장 개방 실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철옹성’ 규제 깬 옴니버스…글로벌 브로커와 손잡는 증권가
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증권사들은 해외 유력 브로커리지 플랫폼과 손잡고 외국인 통합계좌 서비스를 출시하거나 준비 중에 있다. 선봉에 선 삼성증권은 미국 최대 온라인 브로커인 IBKR과 제휴해 미국 투자자 대상 외국인 통합계좌 서비스를 시범 운영하고 있다.
키움증권 역시 지난 2월 미국 모바일 브로커리지의 강자 위불(Webull)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위불은 미국과 홍콩 등 14개 시장에서 2500만 명의 고객을 확보한 리테일 플랫폼이다. 하나증권은 홍콩의 엠퍼러증권, 푸투증권, 일본의 캐피탈파트너스 등과 잇따라 손을 잡으며 글로벌 혈맹 구축에 나섰다. 이밖에 메리츠증권, KB증권, 미래에셋증권 등도 외국인 통합계좌 서비스 출시를 위한 제휴를 추진 중이다.
외국인 통합계좌는 외국인 투자자가 별도의 국내 계좌 개설 없이도 해외 증권사 명의의 계좌 하나로 국내 주식을 일괄 매매·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다.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옴니버스(Omnibus) 방식이지만, 한국에서는 실질 투자자별 거래 내역 보고 규제와 시장 감시 문제로 인해 지난 2017년 제도 도입 이후 10년 가까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당국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기치로 가이드라인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가동이 시작된 것이다.
‘외국인 개미’가 몰려온다…코스피 7000 돌파의 숨은 공신
증권업계가 통합계좌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외국인 수급의 지형도’가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증시에 들어오는 외국인 자금은 연기금이나 대형 펀드 등 기관 위주였다. 하지만 통합계좌 시대가 열리면서 전 세계 개미(개인 투자자)들의 자금이 코스피로 직접 유입될 수 있는 통로가 뚫렸다.
최근 코스피가 7000선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과정에서 외국인이 이틀간 6조원 넘는 순매수를 기록한 배경에도 이러한 인프라 개선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삼성증권은 IBKR과의 협업 소식이 전해지며 2거래일간 주가가 40% 이상 급등하기도 했다. 증권가에서는 해외 투자자들이 앱에서 클릭 몇 번으로 ‘삼전·하이닉스’를 사들이는 구조가 열리면서, 기존 기관 중심이던 수급 체력에 새로운 엔진이 장착됐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관 투자자들 입장에서도 변화는 반갑다.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은 그동안 투자자별로 개별 계좌를 만들어야 했던 한국 특유의 시스템을 ‘극도의 비효율’로 간주해 왔다. 반면 옴니버스 계좌는 글로벌 브로커가 하나의 계좌 안에서 대규모 주문을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어 계좌 개설과 관리의 편의성을 비약적으로 높여준다.
최영진 한화자산운용 부사장(CMO)은 “대만 증시를 끌어올렸던 글로벌 유동성이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는데, 인프라를 정비한 한국 시장이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최근 IBKR 등을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유입된 자금 흐름은 이러한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접근성 패키지 가동’…MSCI 선진국 지수 편입 정조준
이번 통합계좌 확대는 정부가 추진 중인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위한 거대한 로드맵의 한 부분이다. 한국 증시는 시가총액 규모나 기업 경쟁력 면에서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지만, 지독할 정도의 ‘접근성 불편’ 때문에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 신흥국 취급을 받아왔다.
정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24년 외국인 투자등록제를 전격 폐지했다. 이제 외국인들은 금융감독원 사전 등록 없이 여권번호나 법인식별기호(LEI)만으로 즉시 계좌를 열 수 있다. 여기에 외환시장 24시간 개장, 영문 공시 의무화 확대, 대체거래소(ATS) 도입 등이 더해지며 시장 개방 실험은 완성 단계로 향하고 있다.
니콜라 시몽 NH-아문디자산운용 부대표는 “외국인 등록제 폐지 등 최근의 제도 개선은 한국 자본시장 인프라의 매우 의미 있는 현대화를 의미한다”면서 “한국 시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대형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이 기대하는 국제 표준에 한층 더 부합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개방의 대가 ‘감시 빈틈’…감독 체계의 정교화가 관건
다만 열린 시장이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경고음도 무시할 수 없다. 옴니버스 계좌는 수많은 투자자의 주문이 해외 증권사 명의의 단일 계좌에 섞여 들어온다는 점에서 공매도나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가 발생했을 때 실제 행위자를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최근 당국은 최종투자자의 민감 정보를 암호화된 구별번호로 보고받되, 불공정거래 의심 시 실명 정보(키)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정비했다. 개인정보 보호와 시장 감시 사이의 절충점을 찾은 셈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제 불법 거래가 발생했을 때 해외 브로커와 해외 당국으로부터 얼마나 신속하게 실명 키(Key)를 받아낼 수 있을지가 제도 안착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고 있다.
외환시장 규제 역시 남은 숙제다. 역외 원화 결제망 구축 추진 등 파격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이 체감하는 환전 및 헤지 자유도는 여전히 뉴욕이나 런던 등 선진 시장과 격차가 존재한다. MSCI 역시 이러한 인프라 개편이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유기적으로 작동하는지 일정 기간 지켜보겠다는 신중한 입장이다.
결국 최근의 변화는 단순한 편의성 개선을 넘어 한국 자본시장의 체질을 선진국형으로 바꾸는 ‘구조적 전환’의 성격이 강하다. 과거 한국 증시가 ‘해외 자금이 들어오기 어려운 시장’이었다면, 이제는 전 세계 자금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글로벌 유동성의 허브’를 꿈꾸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의 인프라 대전환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가장 강력한 정공법”이라면서 “시장 개방성을 극대화하면서도 감독 체계를 어떻게 정교하게 가져가느냐가 향후 10년 한국 증시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