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코트를 가르는 여성들 [여성, 운동]

뜨거운 코트를 가르는 여성들 [여성, 운동]

코미디언 김민경이 운동하는 모습에 마음이 동한 적 있나요?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고 심장이 뛴 적은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쿠키뉴스 대중문화팀이 운동하는 여성들을 돌아봅니다. 날씬한 몸을 위해 운동하는 건 옛말! 이제 여성들은 보이는 몸이 아닌 기능하는 몸에 주목합니다. 운동장과 체육관으로 나서는 여성들의 힘찬 발걸음을 응원합니다. <편집자 주>

여성 농구 강습 현장.   사진=임형택 기자

“나이스~!” “괜찮아!” “좋다아~!” 활기찬 목소리가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린다. 코트를 분주히 오가는 운동화의 삑삑 대는 마찰 소리가 끊일 줄을 모른다. 홍조가 가득한 얼굴에는 구슬땀이 한가득 흐른다. 공이 골대로 들어가지 않아도 잘했다는 격려소리가 신명 나게 터져 나온다. “내 몸뚱이가 말을 안 들어!” 입으론 툴툴대면서도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공을 바라보는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른다. 긴 머리 질끈 묶고 코트를 누비는 이들은 농구가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뭉친 여성들이다. 

지난 2일과 6일 쿠키뉴스가 찾은 서울 서교동 인아우트 실내 농구장은 농구를 배우려는 여성들의 열의로 가득했다. 최근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인기를 얻으며 농구에 관심을 갖는 여성이 크게 늘었다. 여성 축구를 다룬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이 20·30대 여성들을 풋살장으로 이끌었다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20대부터 30·40대까지 폭넓은 여성들을 농구 코트로 이끌었다. 이종건(26) 인아우트 강사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 이후 한 달 새에 일일 수업(원데이 클래스)을 찾는 수강생이 2배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 강사는 “수업을 진행할 때도 ‘왼손은 거들뿐’, ‘놓고 온다’ 등 ‘슬램덩크’ 명대사를 활용해 설명하면 금세 이해하더라”면서 “‘슬램덩크’ 열풍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농구 강습 현장.   사진=임형택 기자

“‘슬램덩크’ 보고 ‘농구할 결심’이 섰죠”

수강생들은 다양한 이유를 갖고 농구 강습장을 찾았다. 20·30대로 구성된 초급반 8인은 모두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농구할 결심’이 섰다. 영화를 10번 이상 본 사람도 있었다. 서태웅처럼 팔에 손목 보호대를 낀 이도 눈에 띄었다. 수업 시작 전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농구공을 손에 쥐자 모두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초급반은 기초 훈련을 거쳐 슛, 돌파, 패스를 배웠다. “공을 떨어뜨리는 게 정상이에요! 창피해하지 마세요!” 강사의 우렁찬 외침에 수강생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드리블을 연습했다. 어려운 동작이 나와도 지친 기색은 없었다. 얼굴엔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즐거움이 만연했다. 코트 위에서 낯가림은 없었다. 처음 만난 이들도 서로를 응원하는 데 여념 없었다. 한 수강생이 수많은 실패 끝에 레이업 슛을 성공시키자 우렁찬 환호와 함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땀 흘려 발그레해진 볼들엔 생기가 가득했다.

농구를 배우기 위해 인천에서 온 김지은(34), 박진선(37)씨는 동네 코트에서 농구공을 튕기다 원데이 클래스를 찾았다. 농구를 시작한다고 하니 주변에서도 관심이 뜨겁단다. 수업을 각각 4, 5번 들은 류희정(28), 김주연(28)씨는 “다들 재밌냐고 물어본다”면서 “다른 운동보다 속도감이 있다. 골 넣는 게 중독적이라 농구를 마구 권하고 있다”며 흡족해했다. 이들은 농구를 시작하고 삶이 달라진 걸 느낀다. 김주연씨는 농구로 ‘월요병’을 극복했다. 월요일마다 농구 강습이 있어서다. 류희정씨는 “일요일부터 농구장에 갈 준비를 해놓는다. 동네 농구 코트 위치도 알아뒀다”면서 “삶이 농구 위주로 흘러가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이날 드리블과 패스를 처음으로 배워본 김지은, 박진선씨는 농구 매력에 푹 빠졌다. 이들은 “여성에게 흔히들 추천하는 필라테스가 영 재미없었다”면서 “농구로 몸을 움직이는 재미가 무엇인지 알았다.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 농구 강습 현장.   사진=김예슬 기자

“농구는 멋진 운동… 매번 날것의 나와 만나요”

농구 경력 1~2년차로 구성된 중급반은 ‘슬램덩크’ 열풍이 반갑다고 말했다. 영화 개봉 이후 농구에 관심을 갖는 여성이 늘어나서다. 중급반 8명은 나이부터 사는 곳과 직업 모두 제각각 달랐다. 구심점은 농구다. 이들은 이 시간이 소중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녀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임소연(40대)씨는 수업을 시작하자 눈빛부터 달라졌다. 꽁지머리 휘날리며 코트를 누비던 이들 주위로 뜨거운 공기가 맴돌았다. 림을 향해 공을 날리는 손길은 거침없었다. 이들에게 농구는 슛이 다가 아니다. 코트 위에서 몸을 움직이는 모든 과정이 농구였다. 발목보호대를 하고서도 골대 앞에선 망설임 없이 튀어 올랐다. 

이들은 학교에서 농구를 배운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원작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당시 여학생이 체육시간에 할 수 있는 구기종목은 피구와 발야구뿐이었다. “그때 못 배운 한을 이제야 푸나 봐요. 지금이라도 하는 게 어딘지!” 임소연씨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중급반 수강생들은 농구가 모두에게 열린 운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라은애(30대)씨는 “못해도 괜찮다. 농구는 원래 멋으로 하는 것”이라면서 “내가 좋으면, 나 보기에 멋있으면 그만”이라고 쾌활히 말했다. 요가 강사인 우성임(30대)씨는 농구를 시작하고 일상이 활기차졌다. “맨날 차분하게 있다가 농구장에 오면 괴성을 지르며 땀을 뻘뻘 흘려요.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날것의 내가 되는 느낌이 좋아요.” 다양한 취미생활을 전전하던 정다영(30대)씨는 팀끼리 화합하는 농구의 맛에 매료됐다. 이들은 “모르는 사람과도 곧장 합을 맞출 수 있는 게 농구의 매력”이라면서 “남이 못하는 건 괜찮다. 내가 못할 때 화가 난다”며 깔깔 웃었다.

여성 농구 강습 현장.   사진=임형택 기자

“이 재미난 농구를, 더 많은 여성이 하길 바라요”

이곳에서 만난 수강생 모두가 “여성이 단체운동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중급반을 수강 중인 박모씨(30대)와 라은애씨는 “여성도 농구를 일상에서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여성이 재미를 느낄 만한 운동이 너무 없다”고 지적했다. 야외 코트에서 별난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한 일이다. 임소연, 우성임씨는 “야외에서 농구를 할 때마다 기특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져 불쾌하다”면서 “우리가 하는 것을 농구가 아닌 공놀이로 취급하는 것도 거북했다”고 말했다. 농구 전 풋살을 했다는 류희정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류씨는 “대학교 운동장 한쪽에서 여성 축구를 할 때면 남성 동기들이 한소리씩 얹고 가더라”며 “여성 풋살 모임을 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운동할 때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고 토로했다. 

농구는 ‘건강한 나’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이제 갓 농구에 입문한 김지은, 박진선씨는 ‘보디 포지티브’(외모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몸을 사랑하자는 뜻)에 관심이 커졌다. 두 사람은 “‘운동하는 나’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면서 “얼굴 꾸밈새보다 ‘건강한 나’에 집중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초급반 수강생 4인은 “농구를 할 때마다 개운하고 상쾌하다. 다른 내가 되는 기분”이라면서 “무엇보다도 재밌다. 심지어 놀면서 건강해진다. 농구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미소 지었다. 중급반 8인 역시 이에 강력히 동의했다. 이들은 농구하는 여성이 많아지길 염원했다. “‘슬램덩크’ 인기가 더 이어지길 바라요. 더 많은 여성이 농구를 해봤으면 좋겠거든요. 이 재미난 걸 저희끼리만 하긴 너무 아깝잖아요!”

여성 농구 강습 현장.   사진=임형택 기자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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