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본적인 이유는 암이라는 질병 자체의 복잡성에 있다. 암은 단일 질병이 아니다. 하나의 종양 안에 수백만 개의 서로 다른 암세포가 공존하며, 공통된 패턴이 없다. 종양 주변의 미세환경(면역세포, 기질세포, 혈관 구조)을 분석하지 않으면 암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고, 투약한 약물이 실제 암세포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수만 개의 변수가 존재하는 이 복잡계를, 사람의 힘만으로 풀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벽을 AI로 넘으려는 시도가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달, LG AI연구원은 미국암연구학회(AACR) 2026에서 밴더빌트대학교 메디컬 센터와 공동 개발 중인 ‘암 에이전틱 AI’를 공개했다. 조직 병리 이미지 한 장으로 1분 이내에 3만개 이상의 암 유전자 활성을 예측하고, 환자 맞춤형 치료 전략까지 설계하는 시스템이다. 기존에 4주 이상 걸리던 암 진단·치료 설계를 하루로 단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제약사가 아닌 AI 기업이 항암제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LG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나스닥에 상장한 AI 기업들이 지금 바이오 시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구글 노벨상, 템퍼스 10조 기업… 왜 AI 기업들이 바이오에 뛰어드나
2024년,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단백질 구조를 AI로 예측하는 이 기술은, 신약 개발의 출발점인 ‘타겟 발굴’ 과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같은 해 나스닥에 상장한 템퍼스AI는 현재 시가총액 약 80억 달러(약 10조4000억원)를 기록하고 있다. 종양학 분야 세계 최대 규모의 임상 데이터를 보유한 이 기업은 2025년 매출 12.6억 달러(약 1조6400억원)를 달성하며 전년 대비 80% 성장했다.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 노바티스, 머크, 릴리 등 70곳 이상의 빅파마가 템퍼스의 AI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
병리 AI 분야에서는 미국 페이지AI가 FDA 최초의 AI 기반 병리 진단 소프트웨어 승인을 받았다.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스핀아웃한 이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와 협업해 10억 장 이상의 병리 이미지를 학습한 초대형 AI 모델을 개발했으며, 2025년 4월에는 여러 암종을 동시에 탐지하는 범암 진단 AI로 FDA 혁신기기 지정을 받았다. 제약사가 ‘약을 만드는’ 기업이라면, 이들은 ‘약이 될 놈을 골라주는’ 기업이다. 신약의 타겟 발굴, 환자 선별, 임상 설계, 치료 반응 예측까지—AI가 신약개발의 전 과정에 침투하고 있다.
LG AI연구원, ‘암의 구글맵’을 그리다
이러한 글로벌 흐름의 한국판이 LG AI연구원의 ‘엑사원 패스(EXAONE Path)’다. 엑사원 패스는 조직 병리 이미지를 분석해 종양 주변의 면역세포 분포, 유전자 변이, 약물 반응성을 예측하는 AI 모델이다. 기존에는 유전체 검사에 2주 이상의 시간과 수백만 원의 비용이 필요했지만, 엑사원 패스는 병리 슬라이드 한 장으로 1분 이내에 3만개 이상의 유전자 활성을 예측한다. LG AI연구원은 이를 ‘암의 구글맵’이라고 표현했다. 암세포가 사는 공간의 지도를 AI로 정밀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발표된 엑사원 패스 2.0은 전체 슬라이드 이미지를 통합 학습하는 기술을 적용해 예측 정확도를 78.4%까지 끌어올렸으며, 글로벌 벤치마크에서 병리 진단 관련 최고 수준의 성능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1월에는 국내 정밀진단 기업 엔젠바이오가 엑사원 패스 2.0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며 상업화의 첫 걸음을 뗀 바 있다.
LG AI연구원이 다른 AI 기업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현장 중심’ 접근이다. 기존 AI 기업들이 보유 기술을 먼저 만들고 임상 적용처를 찾는 방식이라면, LG는 밴더빌트 메디컬 센터의 의료진이 현장에서 겪는 실제 문제에서 출발한다. 밴더빌트 측이 검체 확보와 데이터 관리, 연구 방향 설정을 담당하고, LG AI연구원이 AI 모델 전체를 개발하는 구조다. 공공 데이터가 아닌 실제 환자의 리얼월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임상 현장에서의 신뢰도가 높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지난달 AACR에서 공개한 ‘암 에이전틱 AI’는 이 협업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LG의 대형언어모델 엑사원과 병리 특화 AI가 결합된 다중 에이전트 시스템으로, 암 조직 이미지 분석, 유전자 활성 확인, 예측 결과 검증, 후보 약물 평가, 치료 전략 설계까지 단계적으로 수행한다. 밴더빌트 측은 기존 의료 AI가 단일 질의에 단편적으로 응답하는 형태였다면, 이번 시스템은 다수의 AI 에이전트가 협업해 분석에서 검증, 설계, 결정 지원까지 이어지는 구조라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LG는 그룹 차원에서 2026년까지 AI·데이터 분야에 3.6조원을 투자하며 엑사원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구글이 알파폴드로 노벨상을 받았고, 템퍼스가 나스닥에서 10조원 기업이 됐으며, 페이지AI가 FDA 승인을 받은 이유는 같다. 항암제 성공률 20%라는 벽은 ‘약을 더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넘을 수 없고, ‘환자와 질병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는 것’에서 돌파구가 열린다는 사실을 시장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LG AI연구원의 엑사원 패스가 병리 슬라이드 한 장으로 그 이해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지, 시장은 주목하고 있다.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