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혐오의 일상화, 민주주의를 위협하다 [혐오의 시대①]

정치적 혐오의 일상화, 민주주의를 위협하다 [혐오의 시대①]

조롱은 놀이가 되고, 분열은 일상이 됐다
혐오가 웃음이 된 시대…정책 경쟁 ‘실종’

‘혐오’는 ‘몹시 싫어하고 미워함’을 뜻한다. 이제 이 감정은 단순한 정서를 넘어 일상의 언어이자 놀이처럼 소비되는 시대가 됐다. 조롱은 ‘밈’이 되고, 차별은 유머로 포장된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좀먹는 독성이 자리한다. [혐오의 시대] 시리즈는 혐오가 정치, 외교, 문화, 법 제도 등 사회 전반에 스며드는 현상을 경계하며 혐오 표현의 일상화와 놀이화를 짚고, 혐오를 넘어 공존의 사회를 위한 제도적·사회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그래픽=윤기만 디자이너

‘내란세력’, ‘찢재명’, ‘이죄명’, ‘윤어게인’, ‘김문순대’…

정치적 분열은 이제 조롱과 혐오의 언어로 자리를 잡았다. 거리의 현수막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SNS 댓글에 이르기까지, 정당과 정치인을 향한 혐오 표현은 우리 일상 언어로 스며들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한 신조어나 유행어에 그치지 않는다.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서 유권자들 사이 분열과 적대감을 조성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독성 콘텐츠로 작동하고 있다. 
 
거리와 디지털 공간에 뿌리내린 혐오 표현

서울 도심 곳곳에는 정치인을 풍자한 혐오 표현이 담긴 현수막이 걸려 있다. “내란세력 척결하자” “찢재명 몰아내자” 같은 문구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찢재명’, ‘윤어게인’, ‘김문순대’와 같은 별명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특정 정치인을 향한 비하나 조롱을 담고 있다. 때로는 성적, 지역적, 계층적 편견과 결합되기도 한다.

실제 혐오는 디지털 공간 속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표한 ‘2023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조사’에 따르면 전국 19세 이상 성인 1000명 중 73%가 온라인상에서 혐오 표현을 접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2022년 혐오표현 관련 대국민 인식조사’ 보고서에서도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을 접해본 적 있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82.4%에 달했다. 이는 오프라인의 76.7%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온라인 공간이 혐오의 주요 무대가 되면서, 유권자들은 정치 뉴스를 통해 정보를 얻기보다 감정적 자극을 먼저 받는다. SNS 알고리즘은 논쟁적이거나 혐오를 담은 콘텐츠에 더 높은 가시성을 부여하고, 그 결과 혐오 표현은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진다. 디지털 공간에선 혐오 표현이 마치 하나의 놀이처럼 소비되는 현상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혐오 콘텐츠에 노출된 2030세대

특히 이는 정치 혐오 콘텐츠에 자주 노출되는 2030 청년층에서 두드러진다. 20대 직장인 김다혜(여·29)씨는 “SNS에서 밈처럼 돌아다니는 혐오 표현을 처음에는 그냥 재미로 봤다. 주변에서도 가볍게 소비하는 경향이 있더라”면서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극적인 표현만 남고, 정신적 피로감만 쌓였다”고 토로했다. 한 청년 유권자 김희경(여·33)씨는 “양쪽 진영 다 너무 과격해서 누굴 지지해도 욕먹는 분위기”라며 “정치가 아니라 팬덤 싸움 같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바로 적으로 여기는 분위기라 정치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게 됐다”고 씁쓸해했다.

심리 전문가들은 정치 혐오 표현이 젊은 세대의 ‘놀이화’ 현상과 맞물려 있다고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심각한 사안조차 유희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수위 높은 혐오 단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열되고, 가볍게 희화화되는 분위기는 결국 사회 전반의 폭력 수위를 끌어올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현상은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며 “특히 젊은 세대의 혐오 콘텐츠 놀이화는 정치 불신만 더 키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도 “청년층은 공정성에 민감한 세대인데, 반복되는 불공정 상황에 대한 회의감이 혐오 표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상대 후보의 개인적 비위나 사생활까지 거론하며 날카로운 혐오 표현을 쏟아내는 건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전략적 행동”이라며 “혐오 표현의 정치적 이용은 사회 전반에 해악이 큰 만큼 자제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래픽=윤기만 디자이너

혐오를 조장하는 정치, 사라진 정책 경쟁

정치학자들은 정치권도 이러한 흐름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방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엄기홍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당이 지지층을 동원하는 전략으로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라며 “상대를 미워하게 만들고 결집시키는 방식이 정치의 기본 전략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당이 혐오를 자극해 쉽게 정치하려는 구조 속에서 실질적인 정책 경쟁은 실종되고 있다”며 “현재의 혐오정치는 상당히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혐오 정치의 구조적 원인을 양극화된 정치 지형에서 찾았다. 그는 “정당들이 특정 패권을 중심으로 진영 대결에 내몰리다 보니 핵심 지지층은 오히려 더 자극적이고 강한 언어를 선호하게 됐다”며 “거친 욕설을 퍼붓는 정치인이 지지층 사이에선 영웅처럼 여겨지는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처럼 양 진영이 내전 상태로 맞붙는 정치 환경에서는 건전한 정책 논의나 미래 비전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고 우려했다.

혐오가 만드는 정치적 피로감…기준 무너져

이같은 상황은 정치적 의사소통의 수준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역치’를 높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곽 교수는 “자극적인 표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이제 웬만한 언어폭력은 기본값이 돼버렸다”라며 “점점 더 강한 표현이 나와야 반응하는 사회가 되었고, 이에 따라 피로감도 누적되고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도 “이러한 혐오 표현은 개인의 불안과도 관련이 있다”며 “타인을 공격하고 깎아내림으로써 자기 우월성을 입증하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혐오 표현이 반복적으로 남용되면 이에 둔감해지고, 더 자극적인 표현으로 치닫게 된다. 특히 청소년에게는 깊은 상처나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혐오에 둔감해진 사회, 민주주의의 위기

정치권의 혐오 조장과 혐오의 놀이화, 그리고 여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유권자들. 이 삼중 구조는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표현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며 토론과 숙의의 공간이 위축되고, 혐오를 통해 지지를 얻는 정치가 일상화된다면 결국 시민의 정치 참여는 냉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곽 교수는 “결국 혐오 표현이 남용되면 사람들은 점점 더 강한 자극에만 반응하게 되고, 정치에 대한 무감각과 무기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정치인의 자성과 함께 시민 대상의 정치 교육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엄 교수는 “정당은 스스로 윤리 기준을 높이고, 혐오 정치에 대한 제재를 내부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며 “시민들도 정치 혐오에 물들지 않도록 비판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한나 기자
hanna7@kukinews.com
김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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