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급감에 전문의 이탈까지 겹치며 의료현장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3594명을 채용할 계획이었던 내년 신규 레지던트 1년차 지원자는 314명에 불과해 병원들의 인력난은 내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10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5년도 상반기 전공의 레지던트 1년차 모집에 314명이 지원해 8.7%의 지원율을 기록했다. 지원자 중 193명은 수도권 수련병원에, 121명은 비수도권 수련병원에 지원했다. 서울 ‘빅5 병원’(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병원)에는 68명이 지원했으며, 지원율은 8.7%로 집계됐다. 지원자들은 오는 15일 필기시험을 거쳐 17~18일 면접시험을 본다. 최종 합격자는 19일 결정된다.
올해 하반기에 이어 내년 상반기 전공의 지원자가 극소수에 그친 것은 지난 10개월 동안 진행돼 온 의정갈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전공의들은 지난 2월 정부의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 정책에 반대하며 병원을 이탈한 이후 2025학년도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 등을 주장하면서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다. 지난 9일 기준 211개 수련병원 전공의 1만3531명 중 8.7%(1172명)만 출근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후 발표된 ‘전공의 등 미복귀 의료인 처단’ 포고령으로 의료계의 반발이 커진 것도 지원율을 떨어뜨린 요인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발표된 계엄사령부 포고령에는 ‘전공의를 비롯해 파업 중이거나 의료 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해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일산백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지난 3월에 정부의 반헌법적인 명령들이 단순히 의사 집단에 국한된 게 아니라 다음 차례는 국민들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현실이 됐다”며 “내년 응급의학과 신규 레지던트 지원자는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되며 국가 컨트롤타워가 마비가 상태에서 응급의료체계가 정상 작동할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낙상과 호흡기계·심혈관계 질환 위험이 급증하는 겨울철이 응급의료체계 운영에 있어 고비가 될 것으로 봤다. 특히 ‘골든타임’을 요구하는 심혈관계 응급치료 현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혈관이 막히거나(뇌경색) 터지면서(뇌출혈) 뇌손상을 일으키는 질환인 뇌졸중은 골든타임이 있는 대표적인 중증 질환이다. 혈액과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뇌세포가 괴사하면 살릴 방법이 없어 최대한 빠르게 치료하는 것이 최선이다.
장기화된 의료공백 상황에서 의료진의 피로도가 누적된 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대학병원 의료진의 사직 러시가 계속되고 있어 현장 부담은 가중된다. 한지아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올해 2월부터 8월까지 수련병원 88곳에서 사직한 전문의는 2757명에 달한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서 사직한 전문의가 1381명으로 전체의 절반이었다. 이어 경기도 491명, 부산 145명, 대구 134명, 인천 105명, 경남 87명, 광주 67명 등 순이었다.
병원에 남아 있던 기존 인력들까지 이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허성혁 경희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지난달 29일 대한뇌졸중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지방에 있는 모 대학병원 교수님의 연락을 받았는데 내년 2월에 신경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 교수님들이 대거 그만두고 서울이나 경기권으로 올라온다고 한다”고 토로했다. 김영서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도 “지방 의사들은 돈을 덜 벌더라도 사람 많은 곳에서 편하게 일하는 게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해서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것 같다”며 “올해도 많이 올라왔지만 내년 3월에는 더 많은 이동이 있을 것으로 보여 우려가 크다”고 짚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후폭풍이 정국을 휩쓸며 중앙 컨트롤타워가 마비된 가운데 겨울철 응급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할지 의문을 갖는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적지 않다. 이 회장은 “겨울철을 맞아 중풍(뇌졸중)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늘었는데 받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면서 “9일에 당직근무를 섰는데 신경과에서 ‘더 이상 중풍 환자 병상이 없어 신규 환자를 받기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어 “심폐소생술을 받아 가까스로 살아난 환자를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들이 수용하지 않아 우리 병원으로 온 일도 있다”라며 “이런 일들이 거의 매일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정부가 제시한 겨울철 비상진료대책과 관련해선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 6일 복지부는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 수가 250% 가산, 후속진료 수술 수가 200% 인상 등의 내용이 담긴 비상진료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이 회장은 “지역의료의 질은 계속 떨어지고, 의사들의 수도권 이동이 가속화되는 와중에 업무 강도는 높아져만 간다”면서 “억지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대책은 지속 가능한 방안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비상계엄 사태에 따른 혼란 속에서 복지부 장관은 신속하게 사퇴하고 의료계가 인정하는 인물이 의료 정책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김성근 전국의대교수협의회 대변인(여의도성모병원 위장관외과 교수)은 “비상계엄 사태로 정부의 의료개혁 추진은 엉망진창이 됐다”면서 의료 현장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정시 의대 모집 중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대변인은 “며칠 전 강릉에서 서울로 당장 수술이 급한 환자를 받아줄 수 있느냐는 연락이 왔다. 이런 일들이 전국적으로 더 심해질 것”이라며 “다음 정권을 누가 잡든 의대 정원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내놓지 못하면 앞으로 이 부담을 몇 년 이상 끌고 갈지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