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58)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58)

보들레르의 <사치, 평온, 쾌락>을 이미지화 한 마티스

20세기 중반까지 남 프랑스의 생트로페즈(Saint-Tropez)는 한적한 어촌이었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영화 촬영 후 이곳에 거주하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일론 머스크, 축구선수 호나두 같은 수퍼리치들의 휴양지로 변했다. 마티스는 이런 모습을 예견한 듯 그곳을 배경으로 한 <사치, 평온, 쾌락>을 남겼다.   

앙리 마티스, 사치, 평온, 쾌락(Luxe, Calme et Volupté), 1904, 캔버스에 오일, 98.5x118.5cm, 퐁피두 센터, 파리

1904년 마티스는 신인상주의 화가 폴 시냑의 초대로 강한 태양이 내리쬐는 생 트로페즈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시냑은 1892년 지중해 여행 중 이곳의 풍광에 반해 작업실을 마련해 놓았다.

근처에 사는 앙리-에드몽 크로스와 시냑의 영향으로 마티스는 점묘법으로 샤를 보들레르의 시 <여행에의 초대>에서 영감을 받은 <사치, 평온, 쾌락>을 그려서, 1905년 앙뎅팡당전에 출품했다.  

1821년 파리에서 젊은 카롤린느 드파이와 환갑의 나이에 결혼한 프랑수아 보들레르 사이에 샤를이 태어났다.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아버지는 예술적 조예가 깊은 아마추어 화가였다.

보들레르가 시인과 미술평론가의 길을 걷고, 스케치를 즐기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으며, 그의 첫 저작도 <1845년 살롱전>이었다. 보들레르가 6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린 아들의 재산관리는 가족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죽은 남편과 34살 차이가 나는 어머니는 전도 유망한 오픽 소령과 재혼하였다. 그는 장군으로 승진하여, 프랑스 혁명기의 혼란 속에서 이스탄불 소재 공사를 거쳐 상원의원까지 탄탄대로를 걸었다. 기숙학교에서 성적이 나쁘면 집에 오지 못하게 하는 계부는 예술적인 재능을 이어받은 섬세하고 심약한 아이를 헤아리지 못했다.

작문대회에서 입상하여 글솜씨는 인정받았지만 품행불량으로 퇴학당한 보들레르를 상징하는 고독, 우울, 비참함, 모멸감 등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었다. 또 그는 환속한 사제의 아들로 “내 인생은 처움부터 저주받았음이 틀림없다”고 회고했다.  

보들레르는 만 21살이 되자 어머니를 졸라 금화 십만 프랑과 네 곳의 땅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간 방탕한 생활로 쌓인 빚을 갚고, 그 후에도 여전히 물쓰듯 돈을 썼다. 파리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기 전 거리의 여인들에게 매독에 감염되었다.  

상속 25개월 만에 재산의 반을 탕진한 아들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법원에서 ‘금치산 선고’를 받아낸다. 보들레르는46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천형인 매독에 시달리며, 경제적 무능력자로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고, 빚쟁이에게 쫓겨 다녔다. 

1841년 방황하던 보들레르는 가족의 권유로 인도 행 기선을 탔다. 그러나 긴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과 레위니옹 섬 등에서 9개월을 지내다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 그림은 보들레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치, 고요, 쾌락 등이 충만한 동양의 이상향이며 안락한 곳으로 떠나자는 <여행에의 초대>를 마티스가 이미지화 한 작품이다. 

<여행에의 초대> 첫 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아이야, 내 누이야

거기 가서 같이 사는 

그 즐거움을 이제 꿈꾸어라!

느긋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고 지고

그리고 너를 닮은 그 나라에서!

그 흐린 하늘의

젖은 태양은

내 정신을 흐리기에도 알맞게

눈물 너머로 빛나는

내 종잡을 수 없는 눈의

그 신비하고 신비한 매력을 지녔단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질서와 아름다움.

사치와 고요 그리고 쾌락일 뿐 

보들레르는 <악의 꽃, 1857>에는 운문시로, <파리의 우울>에는 산문시로 다시 썼다.  

“(… …)너는 알겠지, 싸늘한 가난 속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이 열병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 대한 이 향수를, 이 호기심의 고뇌를. 너를 닮은 나라가 하나 있어,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풍요롭고, 고요하고, 신실하고, 거기에서는 환상이 서양의 중국을 세워 장식하였고, 거기에서는 삶이 숨쉬기에 아늑하고, 거기에서는 행복이 고요와 결합하지. 살러 가야 할 곳은 거기, 죽으러 가야 할 곳은 거기! (… …)” 
  
앙리 마티스, 생 트로페즈 만, 1904, 캔버스에 유채, 65x50.5cm,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립 미술관, 출처: Wiki Art

<생 트로페즈 만>에 화가는 피크닉을 즐기는 부인 아멜리와 아들 피에르를 그렸다. 여기에 피에르를 일으켜 세우고, 누드 여인 다섯 명을 ‘시적 상상’으로 결합한 게 <사치, 평온, 쾌락>이다. 이렇게 이상향을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철학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구원의 갈망이었다.  

무엇보다 마티스의 이 작품은 일상적인 장면에서 벗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이유는 첫째, 가늘고 굵은 선, 직선, 곡선을 동시에 사용하여 시냑의 점묘법보다 융통성이 있다. 둘째, 하나하나의 색점이 크고 고립되어 색채 자체의 독자성을 갖고 새로운 공간이 창조되었다. 당시 화단의 권력이던 시냑은 또 다른 추종자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이 그림을 흔쾌히 구입하였다.  

그러나 마티스는 이후 신인상주의에 회의를 느껴 더 이상 점묘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65살이 넘은 카미유 피사로도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인 <퐁투아즈의 곡물시장>을 점묘법으로 그렸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의 곡물시장, 1893,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앙리 마티스, 생의 기쁨, 1905년10월~1906년 3월, 캔버스에 유채, 176.5x240.7cm, 필라델피아 반스(Barnes) 재단

콜리우르에서 휴가를 즐기던 마티스는 그곳에서 그리던 그림을 발전시켜 <생의 기쁨>을 완성했다. 사람들은 과감한 색상, 왜곡된 해부학적 구조, 갑작스러운 크기의 변화 등에 화들짝 놀랐다.  

앙뎅팡당전에서 논란이 된 <생의 기쁨>을 본 시냑은 불쾌한 기분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티스가 거의 정신이 나간 것 같다. 그는 2.5m의 캔버스를 엄지 손가락만 한 굵은 선으로 둘러싼 이상한 인물들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는 전체를 비록 순수한 색채이기는 하지만 정떨어지는 색채로 칠해 버렸다.” 

자연의 풍경이나 인물이 주제이긴 하지만, 거기서 느끼는 감정을 자신의 주관적인 색채와 붓 터치 그리고 선으로 표현한 마티스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다. <사치, 평온, 쾌락>이 색채의 탐구였다면, <생의 기쁨>은 선의 구성이다. 이제 마티스는 야수주의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미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리오와 거투르드 스타인 남매는 논란의 중심에 선 이 그림을 구입하였고, 피카소도 역시 큰 영향을 받았다. 거트루드는 후일 이렇게 기록했다. "마티스는 <생의 기쁨>을 그렸고, 그 시대의 모든 화가에게 각인을 될만한 새로운 색의 공식을 만들었다." 

십여 년 전, 나는 눈빛이 반짝이는 한 젊은이를 눈 여겨 보게 되었다. 그는 <여행에의 초대>를 읽고 평범한 직장 대신 도전하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며, 이 시를 낭송하는데 묵직한 여운과 전율이 밀려왔다. 보들레르도 마티스도 여행에서 작품의 동력이 되는 직관을 얻었다. 한 편의 시가 마티스에겐 걸작을, 누군가에겐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한다.

완성된 작품은 예술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스스로 생명력을 갖는다. 

보들레르가 초대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출발은 불가능하지만 정신과 감각의 끊임없는 고양을 통해 그 나라로의 꿈을 간직하는 일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보들레르의 시와 마티스의 그림은 시공의 압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다만 지난해부터 58주 동안 한 주도 쉼 없이 연재하고 있는 [최금희의 인문학 산책]은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작가 자신의 재충전과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미술관과 위대한 예술혼을 찾아 떠나는 여행 등을 위해 당분간 쉰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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