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에게 ‘만약 미술관에 불이 난다면 어떤 그림을 가장 먼저 들고 나갈 것인가’라고 물었다.
오르세를 대표하는 명작 중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이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이 작품은 서양미술사에 근대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같은 해에 그린 ‘올랭피아’와 함께 미술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폴레옹 3세는 직접 살롱에 나가 당선작을 고를 정도로 미술을 장려하는 문화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풀밭 위의 점심’은 살롱에서 떨어졌고, 그래서 1863년 낙선전에 출품되었다.
마네는 나폴레옹 3세에게 자신의 작품이 떨어진 이유를 물어볼 정도로 명망가 집안의 금수저였다. 그는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그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영향으로 역사화나 신화처럼 상당히 큰 세로 208cm, 가로 264.5cm이다.
숲으로 소풍을 온 사람들이 풀밭에 앉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검정 재킷에 회색 바지의 프록코트을 입고 보헤미안 모자까지 쓴 정장 차림인데 여성들은 옷을 벗었다.
누드로 앉아서 관람객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여인은 모델인 빅토린 뫼랑이다. 뫼랑은 관람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뫼랑의 당당한 눈과 마주치다가 오히려 필자가 눈길을 돌렸다.
또 다른 여인이 속옷 차림으로 한 손은 옷을 여미고, 다른 손은 물에 담그며 몸을 구부리고 있다. 여인의 오른편에 그들이 타고 온 작은 조각배가 보인다. 전면에 있는 세 사람에 비하면 이 여인을 작게 그렸지만, 조각배는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다.
당대에는 숲에서 매춘을 했다. 흐트러진 바구니를 보면 이미 점심식사를 마치고 소기의 목적을 이룬 뒤의 모습이다.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는 마네뿐 아니라 많은 화가들이 최고의 화가로 뽑고 있다. 특히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존경하여 어두운 배경에 검은색을 주조로 하는 스페인풍의 그림을 그렸다.
누드의 여인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에서 에로틱한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이전에도 누드는 자주 그림의 소재로 등장했다.
그러나 누드는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을 차용하여 그려졌다. 쿠르베에 의해 사실적이며 노골적인 누드가 등장한지 10년이 지났기에 평범한 여인의 누드를 그렸다는 이유로 살롱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마네는 기존 거장들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그들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풀 밭 위의 점심’의 원제는 ‘목욕’이었다. 이는 마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티치아노가 그린 ‘전원음악회’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나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재해석한 그림이다.
전원에서 음악회를 하며 앉아 있는 여인은 풀룻을 불고, 다른 여인은 항아리에 물을 붓고 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고 남자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며 영감을 불어넣는 시와 음악의 뮤즈일 뿐이다. 시와 음악이란 추상적인 개념을 여인의 누드라는 물리적인 형태로 담았다. 그래서 이런 위선적인 누드는 계속 그려졌다.
마네의 회화는 스토리를 버렸다. 이전의 그림은 스토리가 있으며 알레고리와 도상으로 그림의 주제를 전달해 주었다. 마네에게는 주제가 있기는 해도, 그것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최소한의 구실일 뿐이다.
‘풀밭 위의 점심’이나 ‘올랭피아’와 같은 자극적인 주제도 과거 거장들의 회화에서 모티브를 빌려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앵그르를 비롯한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이상적인 누드는 서양미술사에서 300년 동안 추구한 환영(幻影)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전통적으로 아카데미에서는 누드 습작을 통해 화가들의 기량을 판단하였다. 쿠르베는 코르셋으로 변형된 허리를 묘사하며 있는 그대로 여인의 몸을 사실적으로 그려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환영의 아름다움에 도전장을 내민 쿠르베는 현실의 아름다움을 담아냈다. 마네도 쿠르베처럼 현실의 여인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카바넬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왜 ‘풀밭 위의 점심’이 살롱에서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19세기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의 화가나 조각가라면 이탈리아에서 국비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는 로마상을 받는 게 최고의 영예였다.
카바넬(Alexandre Cabanel, 1823~1889)는 로마상을 받고 고대문명의 정수와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를 배우고 온 촉망받는 화가였다. 그는1863년 살롱에 심사위원으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탈락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국립미술학교인 에콜드 보자르의 교수로 활동하며 살롱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비너스의 탄생’은 오늘날 마네의 작품과 비교될 때만 등장한다.
눈 밝은 졸라(Emile Zola)는 “카바넬의 ‘비너스 탄생’은 단지 여성의 육체를 욕망의 대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한 눈가리개일 뿐이고, 모든 미학적 규칙은 사라지고 그저 아름답게만 표현한 누드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 2023’에서 방향도 없고 의미도 사라진 스마트한 현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 내 느낌,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화가들도 역시 앵무새처럼 기존의 그림을 답습하고 있었다.
화가들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보수적인 심사위원의 기준에 충족하는 그림으로 살롱에 입선하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산층에 인기있는 작품은 바르비종파의 아카데미풍 전원 풍경이나 고상한 주제를 가장해서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는 그림이었다.
서사에 종속되지 않는 그림, 회화 이외의 일체의 의미를 제거한 그림, 오브제(Ob jet)로서 회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 등 이러한 마네의 미학은 결국 캔버스에 선과 색채만 남기게 된다.
그러했기 때문에 현대의 평면 회화, 추상회화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마네의 위대성이 거기에 있다.
마네는 자신의 그림에 혹평을 하는 비평가들에게 “그림은 색깔놀이에 불과하다”며 기존의 회화에서 극단적인 물질성으로 환원시켰다.
그는 ‘풀밭 위의 점심’에서 부르주아 남성들의 위선을 고발하였다.
보들레르가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요구한 대로 현실의 파리에 살고 있는 남성과 여성을 그려 넣어 근대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도 기존의 주제와는 다른 현실의 여인을 그렸기에 거센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마네의 ‘올랭피아’가 1865년 살롱에 입선하여 전시되었을 때 관람객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칼로 화폭을 그으려고 하여 경찰 세 명이 경비를 섰다.
르네상스 이래 여자의 누드를 다반사로 그렸던 서구 미술사에서 도대체 무엇이 이 그림을 그토록 스캔들로 만들었던 것인가?
겉으로는 외설을 내세웠지만 실은 원근법의 무시, 내부 조명과 깊이의 제거, 주제의 사라짐 같은 기법 상의 문제가 스캔들의 실질적 원인이었다.
인체의 볼륨감도 없다. 르네상스 시대 비너스 여신들의 풍만하고 육감적인 볼륨감은 물론 르누아르가 그렸던 여인들의 포동포동함마저 발견하기 힘들다.
그가 그린 여인들의 나체는 촉각적인 양감이 전혀 없어서 종이 인형처럼 메마르고 평면적이다.
현대 세계는 더 이상 원근법적 미술 세계의 견고성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은 유동적이며, 주체인 우리 자신의 자리도 불안정하다. 유일하게 고정된 하나의 중심이 사라지고, 그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마네는 르네상스적 원근법을 해체하고 미술에 자율성을 도입함으로써 현대의 비재현적 회화의 길을 열며, 포스트모던적 인식의 가능성도 열어준 것이다.
1900년대 초에는 "모든 인간이 합리적이며, 합리성은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합리성에는 한계가 있음이 밝혀졌고 합리성이 옳은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이성 자체가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이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포스트-모던(탈현대)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세잔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 불렀다. 세잔은 3차원의 모든 사물을 2차원의 평면 회화에 옮기며 ‘구, 원기둥, 원뿔’로 단순화하였다.
세잔은 하나의 시점으로 그려지던 이전의 그림에서 탈피하여 여러 시점에서 보는 그림으로 입체주의 화가들의 이론적인 선구자가 되었다. 그 개념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분할하여 펼쳐놓은 것이 피카소였다.
세잔과 피카소는 회화의 형식적인 부분을 실험했다면 그 이전에 마네는 회화의 내용에 대한 혁명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혁명가 마네는 현대 미술이 존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