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로서 완벽했던 나비학자 석주명(1908~1950)은 ‘여자’를 잘 몰랐다. 모든 여자는 어머니 같은 줄 알았다. (‘세계적 나비학자 석주명, 어머니와 여자를 구분 못 하다.’ 편 참조)
그러니 아내와의 부부 싸움에서 백전백패해 서울 만리동 집에서 내복 바람으로 동대문(신당동) 동생 집으로 피신한 것이 장안의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세계적 나비학자’라는 계관이 무색했다.
석주명은 ‘학자다운 학자’라는 수식이 불필요한 뜻 그대로의 ‘학자’였다. 대충 박사 학위 논문 써서 대학교수 자리를 노리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그를 두고 근대적 용어로 기인(奇人), 좀 가벼운 용어로 공붓벌레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본 최고 농림학부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현 가고시마국립대) 유일한 조선 학생 석주명을 눈여겨본 오카지마 교수가 조선 나비를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권하자 처음엔 “학자라뇨? 대학 교수 자리가 조선 사람에게 차례가 오겠습니까?”라고 답했던 석주명이었다.
박사 학위 득했다고 학자가 아니다
이때 오카지마가 이렇게 말한다.
“교수란 살아 있을 때뿐이지 진정한 학자의 명예는 그 사람이 남긴 학문의 업적뿐일세. 학벌이나 직함의 문제가 아니고 요는 업적의 문제야.”
석주명이 스승의 권면을 받아들인 것은 ‘조선 나비 연구’가 조선의 농작물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조국의 깡마른 사람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사실 그는 공부보다 음악에 천재성이 더했다. 신극 공연무대에서 숭실고보 동창 안익태의 첼로 연주보다 그의 만돌린 연주가 더 빛이 났다. 만돌린에서 기타 연주자가 된 그는 조선 제일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곧잘 안익태에게 기타를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 날 그의 여동생 석주선(1911~1991·전 단국대석주선기념박물관장)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세고비아 연주를 듣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난 열 번 죽어도 저렇게 못 될 거야”라고 했다. 그 뒤로 석주명은 기타 연주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자가 되기로 한 석주명은 유학을 마치고 개성의 모교 송도고보 교사가 됐다. 그리고 학교 박물관 연구실을 떠날 줄 몰랐다. 화장실 갈 때만 책상 앞을 떠났다는 게 제자들의 증언이다.
송도고보 제자 김병철(1921~2007·전 중앙대 영문학과 교수)의 회고.
“석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10년간 하면 꼭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는 쭉정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정성껏 가꿔야 한다.”
이 제자 김병철은 ‘헤밍웨이 연구’에 평생을 바쳤고 그러한 공로가 ‘세계인명사전’ 등재로 나타났다. 김병철은 역저 ‘한국 근대 번역문학사 연구’에 이렇게 썼다.
‘그 교훈이 나의 인생관의 지표가 된 고 석주명 스승 영전에 이 책을 바치나이다.’
하지만 석주명의 현실은 식민지 조선인 학자였다. 그 돈 들여 유학 다녀와서 교사 주제에 한가하게 나비 연구라니...포충망과 채집통을 들고 벌판을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기인(奇人)으로 오해받기 좋았다. 농부들은 그를 뱀을 잡아 파는 땅꾼, 혹은 나비를 잡아 약용에 쓰려는 불치병 환자 정도로 보았다.
한반도 북쪽 끝 함북 경흥 지방 두만강 하류에 녹둔도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여 여진족을 물리친 오지다. 그 녹둔도 앞 동해 해상 망망 바다에 알도(卵島)라는 자그마한 섬이 떠 있다. 무인 등대만 있는 곳이다. 석주명은 이곳까지 채집하러 갔다.
한반도 남쪽으로는 제주도 아래 마라도였다. 만주도 우리 땅으로 인식하고 채집하러 다녔다. 울릉도에 들어가 독도까지 가려 했으나 울릉도에서 채집에 열중하다 길을 잃어 하룻밤 새느라 독도에 못 들어갔을 정도다.
‘나는 이상한 남자와 결혼했다.’
석주명과 15년간 결혼 생활을 한 김윤옥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이다. 양가 부모 손에 이끌려 신랑 얼굴도 못 보고 평양 요릿집 갑부 아들과 결혼했는데 ‘공붓벌레’였다. 자신도 평양제2고녀를 나온 신여성, 현대인의 스포츠 ‘육상 달리기 선수’이기까지 한데…결혼한 이 남자, 공부와 나비 채집 아니면 기타만 친다.
김윤옥은 활달한 사람이었다. 반면 석주명은 고지식하기 짝이 없었다. 이 둘은 석주명이라면 목숨도 던질 ‘맹모삼천’ 어머니 김의식(1881~1938)의 주선으로 혼사가 성립됐다. 후처였던 김의식은 선처가 죽자 종부가 되었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했던 남편의 첩과도 살았다.
그런 남편은 사업이 기울면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김의식은 아들을 평양 숭실고보에서 ‘강남 신흥 명문’ 개성 송도고보로 전학시켰다. 또 ‘딴따라’ 하겠다는 아들을 주저앉혀 일본 최고의 농림고등 가고시마농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극성 엄마는 송도고보를 졸업하던 해 참한 규수를 택해 혼인시켜 유학길에 따라 보냈다(석주명 연구가 이병철 자료에도 첫 결혼에 대한 자료 부족 등이 거론된다). 졸업 후 금의환향(1929년)한 석주명은 함경남도 함흥의 신흥 명문 영생학교 교사가 된다. 한데 이 해 첫 부인과 사별한다. 그리고 1934년 김윤옥과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외동딸을 두었다.
이들 부부의 불화는 신혼여행부터 시작됐다. 1931년 송도고보에 부임해 ‘총각 선생님’으로 지내다 결혼해 개성 노적봉 밑 초가에서 살림을 차렸는데 워낙 성격 차이가 심했다. 무엇보다 석주명은 목소리 높고, 키도 크고, 얼굴 넓은 아내를 포용하지 못했다. 석주명은 키가 작고 가무잡잡했다.
결혼 직후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기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던 두 사람.
“이 열차에는 식당 칸이 있어요. 식사하러 가요.”
“비싼 식당 칸에는 뭐하러. 도시락 사 먹으면 되지. 정 그렇다면 혼자 다녀오시오. 난 도시락을 먹을 테니.”
뭐 요즘 애들 말로 공감 능력 제로였다. 이런 서생이 없었다. 김윤옥도 질 사람이 아니라 도착해서 여관을 따로 잡았다. 기선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과 전쟁’은 외동딸(석윤희·87⋅전 미국 북일리노이대 교수) 증언에 의하면 ‘400회가 넘는 부부 싸움’이었다고 한다.
제주 방언⋅에스페란토어 연구, 산악인으로도 명성
부부는 외동딸 외에 갖지 못했다. 김윤옥은 시어머니의 눈총 꽤 받았을 듯하다. 일제강점기 봉급 또박또박 받는 교사 남편과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꿈꿨던 김윤옥은 생과부 신세였다. 전국을 헤집고 다니고, 집에 오더라도 학교 연구실에 박혀 있으니 남편과 대화가 될 리 없다.
그런데 묘하게 직장 야유회 등 부부 동반 행사에는 부부의 사이가 좋았다. 다들 홀로 참석해도 석주명 부부만 같이 참석했다. ‘쇼윈도 부부’였던 셈이다.
석주명은 학문적 자세 외에는 기인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주례로 참석해서 한다는 주례사가 “신랑은 나처럼 불행하게 되지 말라”하고 내려와 버렸다.
당시 만국공통어 에스페란토를 배우러 온 여학생에게도 “너희들도 시집가서 우리 마누라처럼 되면 안 돼”였다.
앞서 얘기한 이계순(95·전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이 교토 제1고녀 시절 일본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나비학자 석주명’에 감동해 열심히 공부, 서울대 사대에 진학한 후 석주명으로부터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며 자료 정리도 도와주곤 했다.
“퇴근 무렵 되면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려나’라고 혼자 말씀하시며 귀가를 걱정했어요. 신혼이신데 왜 사이가 안 좋으시냐 묻자 ‘아내가 돈도 못 벌고 공부만 한다고 트집 잡는다’라고 했어요.”
이 ‘장미의 전쟁’은 1947년 크리스마스 파티 후 파국을 맞는다. 평소처럼 시내에서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하고 서울 만리동 집으로 돌아온 부부. 사교적인 아내는 흥겨운 자리였었다. 석주명은 그런 아내가 못마땅해 우겨서 집으로 돌아왔던 것.
“다른 집 아내들은 조용한데 그 태도가 뭐야.”
“어이구, 파티 석상에서 쉬지도 않고 자기 자랑 늘어놓는 당신은요?”
난투극이 벌어졌고 분을 참지 못한 석주명이 집을 나와 내복 바람으로 동대문(신당동) 동생 집으로 피신한 것이다. 아마도 석주명은 그 자리에서 ‘나비’ 얘길 남이 듣건 말건 장황하게 이어 갔을 것이다.
이 파티 후유증이 부부의 별거를 낳았고, 법정에까지 비화 되어 가십에 오르내리게 된다.
걷는 것조차 시간 아까워 걸으며 땅콩으로 식사를 해결하던 공붓벌레 남편, 따뜻한 밥상을 마주하고 싶었던 아내는 서로 한 치의 배려가 없었다. 이혼 소송을 제기했던 석주명은 최종심까지 가서 승소했다. 전 재산과 딸 양육권까지 넘긴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혼 후 한참 지나 기자가 소감을 묻자 “오히려 공부하기 편하다”라고 밝혔다. 김윤옥은 딸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이 이혼 소송이 화제가 되면서 석주명은 언론으로부터 ‘꽃을 모르는 나비학자’라는 은유의 가시관을 쓰게 됐다.
이렇듯 석주명은 사랑을 몰랐다. 아니 받는 사랑에만 익숙했다. 공부를 사랑했고, 일을 사랑했을 뿐이다. 이혼 후 그는 ‘개성 생약연구소’ ‘제주 생약연구소’ ‘수원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부장’ ‘국립과학박물관 연구부장 및 관장’ 등을 역임하며 ‘학위만 학자’가 아닌 진정한 학자의 길을 보여 줬다. ‘학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시대가 낳은 인물이엇다. 그러니 사랑과 아내는 족쇄였었듯 하다.
나비가 불탄다.
1950년 9·28서울수복 직전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포격에 남산 국립과학관이 포격에 맞아 15만 마리의 나비 표본이 불타 버렸다. 석주명이 우리 산하를 구석구석 돌며 채집한 표본이었다.
1942년 송도고보 교사 시절. 60만 마리의 나비 표본 유지할 능력이 안 됐다.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석주명은 눈물을 머금고 교정에서 60만 마리를 소각했다.
해방이 됐다. 하버드대학이 연구비를 대던 ‘세계적 나비학자 석주명’의 조국 현실은 1950년 6⋅25전쟁의 늪으로 빠졌다. 서울이 인민군에 접수됐어도 석주명은 연구실에 앉아 세상과 담쌓고 씨름했다. “선생님 위험하니 피난 가시죠”하고 제자가 다급히 말해도 “응 그래”하고 영혼 없이 대답했다. 1938년 시작하여 13년 걸린 ‘한국산 접류의 분포 지도’가 막 완성되어 출판되려는 시점이었다.
석주명은 이 분포 지도를 끌어안고 잤다. 어딜 가도 배낭에 넣어 다녔다. 하지만 남산 예장동 국립과학관(옛 조선통감부 건물)의 나비 표본과 문헌은 지킬 방법이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서쪽 하늘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포탄 한 발이 잘못 떨어져 과학관이 불탔던 것이다.
다행히 서울수복이 됐다. 나비 표본 등이 전소되어 충격과 비통에 휩싸여 있던 석주명은 ‘그날’ 신당동 집에서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참석하려고 집을 나섰다. 1950년 10월 6일이었다.
석주명 성격에 유유자적 걸었을 리 없다. 뛰어서 동대문운동장을 지나 충무로 4가쯤에 접어들었다. 남산에서 흘러 내려온 개천가였다. 석주명의 급한 걸음에 어떤 사람이 발에 걸렸다. 그리고 시비가 붙었다. 물들인 군복 입은 술에 취한 청년들이었다. 석주명은 평양 사투리를 진하게 썼다. 평생 몸에 밴 사투리였다.
“이놈 인민군 소좌다!”
“아니오, 나는 나비학자 석주명이오.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이계순이 목격자 등을 종합한 증언)
곧 그들의 소총에서 불이 뿜었다. 그리고 쓰러진 석주명을 개천에 밀어 넣어 버렸다. 며칠 후 천신만고 끝에 가족이 찾았을 때 거적때기가 덮여 있었다. 서북청년단 소행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그러나 인명(人命)은 예측할 바가 못 되어 필자는 항상 적당한 곳에서 단락을 지어 소저(小著)를 거듭한 지 벌써 백여 차이고...’(죽기 전 써 놓은 ‘한국산 접류의 연구’ 서문 중·1973년 정식 발간)
짧은 기간 17권의 저서, 128편의 논문을 남긴 박사 학위 없는 학자 석주명은 그렇게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下·끝>
lakajae@kukinews.com
그러니 아내와의 부부 싸움에서 백전백패해 서울 만리동 집에서 내복 바람으로 동대문(신당동) 동생 집으로 피신한 것이 장안의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세계적 나비학자’라는 계관이 무색했다.
석주명은 ‘학자다운 학자’라는 수식이 불필요한 뜻 그대로의 ‘학자’였다. 대충 박사 학위 논문 써서 대학교수 자리를 노리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그를 두고 근대적 용어로 기인(奇人), 좀 가벼운 용어로 공붓벌레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본 최고 농림학부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현 가고시마국립대) 유일한 조선 학생 석주명을 눈여겨본 오카지마 교수가 조선 나비를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권하자 처음엔 “학자라뇨? 대학 교수 자리가 조선 사람에게 차례가 오겠습니까?”라고 답했던 석주명이었다.
박사 학위 득했다고 학자가 아니다
이때 오카지마가 이렇게 말한다.
“교수란 살아 있을 때뿐이지 진정한 학자의 명예는 그 사람이 남긴 학문의 업적뿐일세. 학벌이나 직함의 문제가 아니고 요는 업적의 문제야.”
석주명이 스승의 권면을 받아들인 것은 ‘조선 나비 연구’가 조선의 농작물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조국의 깡마른 사람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사실 그는 공부보다 음악에 천재성이 더했다. 신극 공연무대에서 숭실고보 동창 안익태의 첼로 연주보다 그의 만돌린 연주가 더 빛이 났다. 만돌린에서 기타 연주자가 된 그는 조선 제일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곧잘 안익태에게 기타를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 날 그의 여동생 석주선(1911~1991·전 단국대석주선기념박물관장)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세고비아 연주를 듣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난 열 번 죽어도 저렇게 못 될 거야”라고 했다. 그 뒤로 석주명은 기타 연주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자가 되기로 한 석주명은 유학을 마치고 개성의 모교 송도고보 교사가 됐다. 그리고 학교 박물관 연구실을 떠날 줄 몰랐다. 화장실 갈 때만 책상 앞을 떠났다는 게 제자들의 증언이다.
송도고보 제자 김병철(1921~2007·전 중앙대 영문학과 교수)의 회고.
“석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10년간 하면 꼭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는 쭉정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정성껏 가꿔야 한다.”
이 제자 김병철은 ‘헤밍웨이 연구’에 평생을 바쳤고 그러한 공로가 ‘세계인명사전’ 등재로 나타났다. 김병철은 역저 ‘한국 근대 번역문학사 연구’에 이렇게 썼다.
‘그 교훈이 나의 인생관의 지표가 된 고 석주명 스승 영전에 이 책을 바치나이다.’
하지만 석주명의 현실은 식민지 조선인 학자였다. 그 돈 들여 유학 다녀와서 교사 주제에 한가하게 나비 연구라니...포충망과 채집통을 들고 벌판을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기인(奇人)으로 오해받기 좋았다. 농부들은 그를 뱀을 잡아 파는 땅꾼, 혹은 나비를 잡아 약용에 쓰려는 불치병 환자 정도로 보았다.
한반도 북쪽 끝 함북 경흥 지방 두만강 하류에 녹둔도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여 여진족을 물리친 오지다. 그 녹둔도 앞 동해 해상 망망 바다에 알도(卵島)라는 자그마한 섬이 떠 있다. 무인 등대만 있는 곳이다. 석주명은 이곳까지 채집하러 갔다.
한반도 남쪽으로는 제주도 아래 마라도였다. 만주도 우리 땅으로 인식하고 채집하러 다녔다. 울릉도에 들어가 독도까지 가려 했으나 울릉도에서 채집에 열중하다 길을 잃어 하룻밤 새느라 독도에 못 들어갔을 정도다.
‘나는 이상한 남자와 결혼했다.’
석주명과 15년간 결혼 생활을 한 김윤옥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이다. 양가 부모 손에 이끌려 신랑 얼굴도 못 보고 평양 요릿집 갑부 아들과 결혼했는데 ‘공붓벌레’였다. 자신도 평양제2고녀를 나온 신여성, 현대인의 스포츠 ‘육상 달리기 선수’이기까지 한데…결혼한 이 남자, 공부와 나비 채집 아니면 기타만 친다.
김윤옥은 활달한 사람이었다. 반면 석주명은 고지식하기 짝이 없었다. 이 둘은 석주명이라면 목숨도 던질 ‘맹모삼천’ 어머니 김의식(1881~1938)의 주선으로 혼사가 성립됐다. 후처였던 김의식은 선처가 죽자 종부가 되었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했던 남편의 첩과도 살았다.
그런 남편은 사업이 기울면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김의식은 아들을 평양 숭실고보에서 ‘강남 신흥 명문’ 개성 송도고보로 전학시켰다. 또 ‘딴따라’ 하겠다는 아들을 주저앉혀 일본 최고의 농림고등 가고시마농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극성 엄마는 송도고보를 졸업하던 해 참한 규수를 택해 혼인시켜 유학길에 따라 보냈다(석주명 연구가 이병철 자료에도 첫 결혼에 대한 자료 부족 등이 거론된다). 졸업 후 금의환향(1929년)한 석주명은 함경남도 함흥의 신흥 명문 영생학교 교사가 된다. 한데 이 해 첫 부인과 사별한다. 그리고 1934년 김윤옥과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외동딸을 두었다.
이들 부부의 불화는 신혼여행부터 시작됐다. 1931년 송도고보에 부임해 ‘총각 선생님’으로 지내다 결혼해 개성 노적봉 밑 초가에서 살림을 차렸는데 워낙 성격 차이가 심했다. 무엇보다 석주명은 목소리 높고, 키도 크고, 얼굴 넓은 아내를 포용하지 못했다. 석주명은 키가 작고 가무잡잡했다.
결혼 직후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기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던 두 사람.
“이 열차에는 식당 칸이 있어요. 식사하러 가요.”
“비싼 식당 칸에는 뭐하러. 도시락 사 먹으면 되지. 정 그렇다면 혼자 다녀오시오. 난 도시락을 먹을 테니.”
뭐 요즘 애들 말로 공감 능력 제로였다. 이런 서생이 없었다. 김윤옥도 질 사람이 아니라 도착해서 여관을 따로 잡았다. 기선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과 전쟁’은 외동딸(석윤희·87⋅전 미국 북일리노이대 교수) 증언에 의하면 ‘400회가 넘는 부부 싸움’이었다고 한다.
제주 방언⋅에스페란토어 연구, 산악인으로도 명성
부부는 외동딸 외에 갖지 못했다. 김윤옥은 시어머니의 눈총 꽤 받았을 듯하다. 일제강점기 봉급 또박또박 받는 교사 남편과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꿈꿨던 김윤옥은 생과부 신세였다. 전국을 헤집고 다니고, 집에 오더라도 학교 연구실에 박혀 있으니 남편과 대화가 될 리 없다.
그런데 묘하게 직장 야유회 등 부부 동반 행사에는 부부의 사이가 좋았다. 다들 홀로 참석해도 석주명 부부만 같이 참석했다. ‘쇼윈도 부부’였던 셈이다.
석주명은 학문적 자세 외에는 기인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주례로 참석해서 한다는 주례사가 “신랑은 나처럼 불행하게 되지 말라”하고 내려와 버렸다.
당시 만국공통어 에스페란토를 배우러 온 여학생에게도 “너희들도 시집가서 우리 마누라처럼 되면 안 돼”였다.
앞서 얘기한 이계순(95·전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이 교토 제1고녀 시절 일본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나비학자 석주명’에 감동해 열심히 공부, 서울대 사대에 진학한 후 석주명으로부터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며 자료 정리도 도와주곤 했다.
“퇴근 무렵 되면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려나’라고 혼자 말씀하시며 귀가를 걱정했어요. 신혼이신데 왜 사이가 안 좋으시냐 묻자 ‘아내가 돈도 못 벌고 공부만 한다고 트집 잡는다’라고 했어요.”
이 ‘장미의 전쟁’은 1947년 크리스마스 파티 후 파국을 맞는다. 평소처럼 시내에서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하고 서울 만리동 집으로 돌아온 부부. 사교적인 아내는 흥겨운 자리였었다. 석주명은 그런 아내가 못마땅해 우겨서 집으로 돌아왔던 것.
“다른 집 아내들은 조용한데 그 태도가 뭐야.”
“어이구, 파티 석상에서 쉬지도 않고 자기 자랑 늘어놓는 당신은요?”
난투극이 벌어졌고 분을 참지 못한 석주명이 집을 나와 내복 바람으로 동대문(신당동) 동생 집으로 피신한 것이다. 아마도 석주명은 그 자리에서 ‘나비’ 얘길 남이 듣건 말건 장황하게 이어 갔을 것이다.
이 파티 후유증이 부부의 별거를 낳았고, 법정에까지 비화 되어 가십에 오르내리게 된다.
걷는 것조차 시간 아까워 걸으며 땅콩으로 식사를 해결하던 공붓벌레 남편, 따뜻한 밥상을 마주하고 싶었던 아내는 서로 한 치의 배려가 없었다. 이혼 소송을 제기했던 석주명은 최종심까지 가서 승소했다. 전 재산과 딸 양육권까지 넘긴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혼 후 한참 지나 기자가 소감을 묻자 “오히려 공부하기 편하다”라고 밝혔다. 김윤옥은 딸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이 이혼 소송이 화제가 되면서 석주명은 언론으로부터 ‘꽃을 모르는 나비학자’라는 은유의 가시관을 쓰게 됐다.
이렇듯 석주명은 사랑을 몰랐다. 아니 받는 사랑에만 익숙했다. 공부를 사랑했고, 일을 사랑했을 뿐이다. 이혼 후 그는 ‘개성 생약연구소’ ‘제주 생약연구소’ ‘수원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부장’ ‘국립과학박물관 연구부장 및 관장’ 등을 역임하며 ‘학위만 학자’가 아닌 진정한 학자의 길을 보여 줬다. ‘학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시대가 낳은 인물이엇다. 그러니 사랑과 아내는 족쇄였었듯 하다.
나비가 불탄다.
1950년 9·28서울수복 직전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포격에 남산 국립과학관이 포격에 맞아 15만 마리의 나비 표본이 불타 버렸다. 석주명이 우리 산하를 구석구석 돌며 채집한 표본이었다.
1942년 송도고보 교사 시절. 60만 마리의 나비 표본 유지할 능력이 안 됐다.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석주명은 눈물을 머금고 교정에서 60만 마리를 소각했다.
해방이 됐다. 하버드대학이 연구비를 대던 ‘세계적 나비학자 석주명’의 조국 현실은 1950년 6⋅25전쟁의 늪으로 빠졌다. 서울이 인민군에 접수됐어도 석주명은 연구실에 앉아 세상과 담쌓고 씨름했다. “선생님 위험하니 피난 가시죠”하고 제자가 다급히 말해도 “응 그래”하고 영혼 없이 대답했다. 1938년 시작하여 13년 걸린 ‘한국산 접류의 분포 지도’가 막 완성되어 출판되려는 시점이었다.
석주명은 이 분포 지도를 끌어안고 잤다. 어딜 가도 배낭에 넣어 다녔다. 하지만 남산 예장동 국립과학관(옛 조선통감부 건물)의 나비 표본과 문헌은 지킬 방법이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서쪽 하늘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포탄 한 발이 잘못 떨어져 과학관이 불탔던 것이다.
다행히 서울수복이 됐다. 나비 표본 등이 전소되어 충격과 비통에 휩싸여 있던 석주명은 ‘그날’ 신당동 집에서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참석하려고 집을 나섰다. 1950년 10월 6일이었다.
석주명 성격에 유유자적 걸었을 리 없다. 뛰어서 동대문운동장을 지나 충무로 4가쯤에 접어들었다. 남산에서 흘러 내려온 개천가였다. 석주명의 급한 걸음에 어떤 사람이 발에 걸렸다. 그리고 시비가 붙었다. 물들인 군복 입은 술에 취한 청년들이었다. 석주명은 평양 사투리를 진하게 썼다. 평생 몸에 밴 사투리였다.
“이놈 인민군 소좌다!”
“아니오, 나는 나비학자 석주명이오.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이계순이 목격자 등을 종합한 증언)
곧 그들의 소총에서 불이 뿜었다. 그리고 쓰러진 석주명을 개천에 밀어 넣어 버렸다. 며칠 후 천신만고 끝에 가족이 찾았을 때 거적때기가 덮여 있었다. 서북청년단 소행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그러나 인명(人命)은 예측할 바가 못 되어 필자는 항상 적당한 곳에서 단락을 지어 소저(小著)를 거듭한 지 벌써 백여 차이고...’(죽기 전 써 놓은 ‘한국산 접류의 연구’ 서문 중·1973년 정식 발간)
짧은 기간 17권의 저서, 128편의 논문을 남긴 박사 학위 없는 학자 석주명은 그렇게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下·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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