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백 풍경 속에는 그리움과 향수가 가득 배어 있다. 쿠키뉴스는 오래 전 시간이 멈춘 듯한 정겨운 고향 마을과 도시 개발로 얼마 남지 않은 골목풍경, 근대문화유산, 전통의 맥을 잇는 사람들을 찾아 ‘레트로 감성 여행’을 떠난다.
200여 악기 상점과 관련업체 1,200여명의 상인과 고객, 뮤지션들의 지난 시간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낙원악기상가’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았다.
[6회]낙원악기상가, ‘한국의 시대상을 읽다’
- 세계에서 손꼽히는 악기상가 자부심
- 레트로와 뉴트로가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
- 음악과 낭만 가득한 낙원상가는 언제나 '낙원'
- 악기 연주자들에게 마음의 고향
- 상인들, 코로나19 거뜬히 헤쳐 나갈 것

1970년대 말 이민을 꿈꾸는 청년이 낙원 상가를 찾았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모습의 젊은이는 피아노 조율을 배운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밤낮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절대음감으로 정확하게 소리를 치료하며 피아노 조율사로 명성을 얻었다. 대형악기사 대리점에서 피아노 조율사로 10년 여 근무하다 개업을 준비한다. 그때 선배 한 분이 “요즈음 기타가 잘 나가니 기타를 파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에 1987년 그는 낙원악기상가 한켠에 조그마한 기타 전문점을 개업한다. 이름도 구석에 있는 가게라 하여 ‘코너하우스’. 지금 기타 매니어들에게 명소가 된 경은상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개업 당시는 전두환 정권의 과외금지조치로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학생들 사이에 통기타가 인기를 끌며 너나없이 기타를 배우던 시절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 활황이었던 ‘3저 호황’으로 순항하던 제5공화국 시절에는 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팝송 한 두곡 정도는 기타를 반주 삼아 호기롭게 불러야 여학생들에게 대접을 받았다. 경은상사의 성장은 우리 사회의 발전상과 함께 한다.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낙원동)에 위치한 낙원빌딩은 서울의 여느 건물과는 다름이 있다. 필로티 구조의 건물 1층에 주차장이 있는 곳은 많지만 낙원빌딩은 주차장뿐 아니라 신호등과 횡단보도까지 있다. 건물 1층이 공용의 도로이다.
강남의 타워팰리스보다 몇 십 년 앞선 한국의 1세대 주상복합건물인 낙원빌딩의 2층 3층은 온갖 빛깔의 악기들이 교향악단처럼 펼쳐진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종합악기상가가 자리하고 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악기가 판매되고 수리되고, 대여도 하는 등 300여 악기 관련 업체가 입점해 있다.

4층과 5층에는 악기관련 사무실과 합주연습실, 전시공간 ‘d/p’와 실버영화관, 야외 공연장(아트라운지 멋진하늘) 등이 자리하고 있다.

상가 지하에는 옛 모습 그대로 백열전구 아래 구수한 청국장과 저렴한 가격에 맛난 잔치국수를 맛 볼 수 있는 재래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낙원상가는 악기 연주자들에게 마음의 고향이자 반세기를 한자리에서 영업을 이어온 상인들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산증인이다.

시대 따라 부침 심했지만 굳굳이 한 자리에
초창기 낙원상가는 낙원시장의 상인들이 입주해 의류 매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0년대 초, 정부가 전국 학교에 풍금과 피아노 공급 정책을 펼치면서 종로 2가와 탑골공원 담벼락에 지어진 파고다아케이트에는 건반 악기와 관악기 관련 점포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1979년 탑골공원 정비사업으로 파고다아케이트와 주변 악기 점포들을 철거하면서 이들을 낙원 상가로 옮긴 것이 낙원상가가 악기 점포들이 들어서게 된 시작이라고 한다.

1980년대엔 전두환 정권이 통행금지를 해제함과 동시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8 서울 올림픽 등 많은 국제 행사를 위해 유흥업소 관련 규제가 완화되면서 폭발적으로 라이브 밴드 수요가 늘었다. 더불어 수입 규제도 풀리고 수입 악기들의 판매가 늘면서 성장기에 있던 낙원악기상가를 크게 번영시켰다. 당시 낙원악기상가는 악기 도·소매상가뿐만 아니라 ‘실용음악’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특별히 없었기 때문에 연주자 양성소 역할도 함께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IMF 경제 위기로 유흥업소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게 된다. 무엇보다 무인반주기 ‘가라오케’의 등장으로 라이브 밴드 자리를 가라오케가 대체하고 전문 연주자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잃고 만다. 자연스레 악기시장도 급속히 냉각되었다. 이후 낙원악기상가를 지탱하게 한 것은 각 대학의 노래운동과 한국교회의 부흥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합법적인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노래운동을 펼치기 위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 활동을 하고 전국 대학에 동아리가 결성되면서 제2의 통기타 붐이 일어난다. 그리고 전국의 교회에 찬양팀이 생기고 찬양집회, 열린예배가 시작되었다. 교회마다 방송시설을 확충하고 기타와 드럼 등으로 크고 작은 밴드가 꾸려졌다.

2000년대부터는 대학교에 실용음악과가 생기고 TV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악기시장은 다시 활성화되고 각 직장과 동네마다 아마추어 밴드가 결성되었다. 2010년대를 지나며 소위 베이비붐 세대가 일선에서 은퇴하면서 악기시장은 다시 한 번 성수기를 맞는다. 전국 각지 두메산골까지 색소폰 동아리가 결성되고 기타 동아리가 만들어진다. 베이비 붐 세대는 그들이 대학을 다닌 6~70년대 세시봉세대, 즉 통키타 1세대들이다.


상인들, 한국 대중음악사의 산증인이자 한 축
경은상사 김지화 대표는 “세시봉 시절은 흔히 ‘7080’이라고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들이죠. 베이비부머들은 기타치고 청바지에 생맥주 마시던 세대들이라 기타를 다들 좋아해요. 지금 은퇴하고 그분들이 다시 기타를 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최근 들어 고급 악기의 수요가 늘어난 건 나이가 지긋한 분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이 다시 기타를 잡고 색소폰도 불기 시작해서죠. 예전에 하고 싶어도 살기 바빠서 못했던 취미생활을 근래에 들어서 많이들 하죠” 라고 말한다.

낙원악기상가는 “일단 함께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 시너지 효과가 큰 것 같다. 아무리 큰 매장이라도 하나만으론 이 많은 손님들을 끌어 모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베델악기 김연성(44) 대표는 색소폰 수리의 달인이다. 고수들이 즐비한 낙원상가에서도 손꼽히는 장인이다.

김 대표는 “색소폰은 약 500여 개에 이르는 부품을 3000번 이상의 공정과 튜닝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그만큼 복잡한 악기이기 때문에 이를 취급하고 수리하는 사람의 책임감과 기술수준이 무척 중요하다.”면서 “색소폰은 사람의 숨을 불어넣는 악기다. 그렇기에 가장 따뜻한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낙원악기상가 2층 한복판에 내로라하는 기타 수리의 달인이 있다. 30년 넘게 기타를 수리해 온 이세문(64) 세영악기 대표다. 그는 “요즘 손님들은 소리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예전에는 신중현이나 김태원 같은 전문 음악가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몇 년씩 기타를 조율했다면, 최근에는 일반 손님들도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걸 보면 그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1980년대에는 악사들이 일자리를 구하러 낙원상가에 몰려들었다. 악기 판매도 잘됐고, 일자리도 쉽게 구했다. 하루에 300~500여명의 악사들이 북적였는데 이들은 미8군이나 지방의 클럽, 카바레, 나이트클럽 등의 무대에 올랐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낙원악기상가는 적막강산으로 변했고, 2000년대에는 재개발 바람으로 상인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도 한 가지 일에만 묵묵히 매달리다 보니 달인이라 불리기도 하고 다시 악기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수리도 끊이지 않고 있다”면서 환한 표정을 지었다.

상가 2층의 조금은 한적한 상가 안, 안경 너머 섬세한 손놀림에 연륜이 묻어난다. ‘신광악기’를 운영하는 지병옥(81)씨다. 국내 최초이자 최고 플루트 수리 장인인 그는 1956년 금은세공을 배우러 들어간 곳에서 처음 플루트를 만났다. 누군가 플루트를 들고 와서 떨어진 것을 붙여 달라고 해서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종로의 한 악기판매점 종업원으로 시작해 1969년 자신의 가게를 열고 독립했다. 상당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경험에 의한 수리를 시작한 그가 플루트의 선율에 반해 백발이 성성한 팔순을 넘겨서도 그 소리를 지키며 살아왔다. 장인의 노하우를 둘째 며느리 민경선(49)씨가 열심히 익히는 중이다.

민 씨는 “아버님의 기술이 사장되는 것이 너무 아쉬웠어요. 아날로그적인 면이 마음을 끌어당겼다”면서 “일본에서 가업을 잇는 집안을 많이 봤다. 아버님께 제대로 배우려면 아직도 멀었다”며 수줍게 웃는다. 10평 남짓 좁은 신광악기에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하루 2~3개의 플루트가 원래의 소리로 주인을 찾아간다.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한양악기 최신해 대표는 “악기 장사는 평생 볼 사람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대학에서 인문계열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악기 수리 및 제작 공부를 7년간 했다. 최 대표는 “외국에서 이론을 배워왔다면 아버지에게서는 필드의 경험을 전수받았다”면서 “아버지 덕에 덜 헤맬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야 배울 수 있는 것들, 그 시간을 배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초등학생인 딸이 아빠의 일을 이어가겠다고 말했을 때 보람을 느꼈다. “낙원악기상가의 이미지가 세련되지는 않지만 그 세월과 시간이 보증하는 명성과 신뢰는 어디서도 찾기 힘든 큰 자산인 것 같다.”면서 최 대표는 악기상으로, 악기 수리공으로, 악기 제작자로서의 자부심을 전한다.

낙원악기상가 상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젊은 세대에게 낙원상가를 어떻게 알릴 것인가이다. 낙원악기상가는 현장판매 못지않게 온라인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악기에 대한 정보와 반려악기 캠페인에 대한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유투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등 '우리들의 낙원상가' SNS를 운영 중이다.

낙원악기상가 번영회 정병석(55) 회장은 “70·80년대에는 낙원상가에 구인·구직을 하러 온 음악인들이 가득했다.”면서 “이제 상인들은 낙원상가가 악기를 파는 공간에서 젊은 세대들이 음악을 향유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라고 있다. 그것이 원래 낙원상가의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6년 시작한 ‘반려악기 캠페인’ 호응
상인들로 구성된 ‘낙원상가 번영회’는 다방면의 활동을 진행 중이다. 상가 이야기를 담은 ‘우리들의 낙원상가’라는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다. 2016년부터는 ‘반려악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문화소외계층 아이들에게 악기를 기부하는 ‘악기 나눔 캠페인-올키즈기프트’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마음껏 영업을 못하고 있지만 ‘힙스터 감성’의 수제맥주 펍 ‘실낙원’은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세대는 물론 연인, 직장인들의 핫 플레이스다.

2020년 낙원악기상가 1층에 ‘서울생활문화센터 낙원’이 문을 열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생활문화센터 낙원’은 시민을 위한 ‘생활문화’ 공간이라는 테마로, 낙원악기상가만의 특성과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낙원역사갤러리’와 악기를 수리하고 제작할 수 있는 공간 ‘수리수리공작소’, 악기 장비와 방음 시설을 갖춘 ‘녹음스튜디오’와 ‘연습실’을 사전 예약해서 시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다.

1984년 7월 발매 된 산울림 10집에 수록된 ‘너의 의미’가 30년이 지난 2014년 아이유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라떼기자가 듣는 산울림의 ‘너의 의미’는 베이비붐 세대에게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아이유가 부른 ‘너의 의미’는 밀레니엄 세대에게 주는 의미가 있다.
이런 현상은 요즘 젊은이들이 마냥 새로운 걸 찾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전보다 더욱 검증되고 누적된 음악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덕궁과 종로를 이어주고, 인사동과 익선동을 연결하는 낙원악기상가는 악기를 매체로 우리를 지난 시간과 만나게 해주는 감성 가득한 역사 문화 공간이다.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