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6일 (5)
[솔까말]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하세요

[솔까말]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하세요

승인 2020-09-17 05:25:01 수정 2021-01-13 16: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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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쿠키뉴스DB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오랜만에 본 자기소개서였어. 자기소개서를 처음 쓰는 지인이 내용을 어떻게 채우면 좋을지 도움을 요청했거든. ‘청년 인턴’ 자기소개서를 신기하게 바라봤어. 과거의 내가 어떻게 이 항목들을 채웠는지 떠오르기도 하고, 지금 나라면 어떻게 쓸지 고민도 되더라고.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어. n년간의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가 ‘청년 인턴’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믿었거든. 핵심은 ‘청년’과 ‘인턴’에 있다고 생각했어. ‘청년’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핵심 키워드를 몇 가지로 추리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과 연결해보라고 말해줬지. ‘인턴’을 강조하려면 단순히 많이 경험하고 배우고 싶다는 내용보다, 지원하는 조직에 최대한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라고 했고. 말하면서도 그럴듯해서 조금 놀랐지만 티를 내진 않았어.

시간이 지나니 후회가 들더라. 청년에게 청년을 증명하라는 바보 같은 조언을 했던 거야. 아마 지금도 수많은 청년들이 매일 자신을 증명하고 있겠지. 일자리는 제한돼 있고, 지원하는 사람은 훨씬 많은 상황이란 걸 모두가 알고 있어. 청년들은 자신이 가장 청년답다는 걸, 혹은 가장 뛰어난 청년이라는 걸 증명해하며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고. 청년을 채용하는 조직에겐 다른 사람이 아닌 그를 뽑아야 하는 이유가 필요할 거야. 청년도, 조직도 이렇게 되길 원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고 말았어. 그게 옳은 일이 아닌 걸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말이지.

그 친구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입사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매일 이어져. 인턴이 된 후엔 인턴으로 뽑힌 이유를 증명해야 하고, 신입사원은 신입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해. 후배는 선배의 말에 “넵”이라고 대답하며 후배의 모습을 연기하고, 그 대답을 들은 선배는 다시 부장에게 “넵”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복종의 굴레가 반복되지. 또 실제로 내가 열심히 하고 있어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상사에게 인식시켜야 해. ‘열심히 하는 것’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더라고. 얘기할수록 그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잘한 일 같아.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기본값이 된 것 같아.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려면 자신의 열정과 노력을, 생계가 어려워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자신의 가난을 입증해야 하지. 높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야. 언젠가부터 권력을 가진 쪽이 올바르고 정확한 필터링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대신, 을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 비용과 위험을 줄이는 일이 당연해졌어. 분명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닐 텐데 말이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만 더 해도 될까. 최근 회사에서 ‘2030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어. 회의를 거듭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점은 ‘2030세대다운 콘텐츠가 무엇일까’야. 정작 기획을 하는 우리 역시 20~30대인데 말이지. 오랫동안 ‘나’를 증명하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진짜 내가 누군지 이젠 잘 모르게 된 것 같아. 우린 스스로가 2030세대임을 증명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어. 대신 우리의 이야기에 더 집중해서 솔직한 이야기를 까놓고 말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거든. 이 [솔까말] 코너도 그렇게 탄생하게 됐어. 난 괜찮은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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