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서울 여의도 한 증권사 본사에서 열린 제59기 정기 주주총회는 흡사 철저하게 짜인 각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의장이 안건을 상정하자마자 객석 곳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동의합니다”, “이의 없습니다”라는 복창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재무제표 승인부터 정관 변경까지, 기업의 한 해를 결정짓는 중차대한 안건들이 의결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0분 남짓이었다. 영업보고를 포함한 전체 진행 시간은 20분을 채 넘기지 않았다.
특히 이날 주총장의 풍경은 ‘주주총회’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특이했다. 객석은 시작 전부터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임직원들이 상당수를 선점하면서 주총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주총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주주들은 중앙 좌석에 앉지 못하고 회당 가장자리의 계단식 단상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이날의 진짜 주인인 한 개인 주주가 앉을 곳을 찾지 못해 딱딱한 계단형 단상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은 국내 시장에서 주주가 처한 현실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이는 최근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강력하게 추진 중인 ‘기업 밸류업(Value-up) 정책’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밸류업의 핵심은 단순한 주가 부양이나 배당 확대를 넘어, 기업이 주주를 진정한 경영 파트너로 인정하고 지배구조(거버넌스)를 투명하게 개선하는 ‘문화의 전환’에 있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밸류업 가이드라인 역시 이사회 주도의 중장기 밸류업 계획 수립과 주주·투자자와의 적극적인 소통, 핵심 정보 공시를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날 주총은 직원들을 동원해 객석을 메우고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회의를 진행함으로써, 주주들의 입을 사실상 막는 구시대적 관행의 핵심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역설적이게도 해당 증권사의 외형 성장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당기순이익 1조원을 돌파했고, 업계 세 번째로 종합금융투자계좌(IMA) 사업자 인가를 받는 등 압도적인 성과를 냈다. 하지만 화려한 실적 이면의 지배구조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번 주총의 최대 관심사였던 차기 대표이사 선임 안건은 아예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앞서 “금융지주와의 지배구조 개편 논의가 이어지면서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일정을 잠정 보류하고 이번 정기 주총 안건에서 대표이사 선임안을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사측의 말대로 지배구조 체제 전환과 리더십 개편을 폭넓게 검토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1조원의 수익을 내는 금융회사가 정작 자신들을 이끌 차기 사령탑을 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시나리오와 일정표를 갖고 있는지, 왜 주총 안건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주주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양해를 구하는 절차조차 생략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경영진의 리더십 공백과 지배구조의 불확실성이 주총 당일까지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주총장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남긴 채 서둘러 문을 닫았다.
불과 이틀 전 열린 미래에셋증권의 주총은 좋은 비교가 된다. 개인 및 기관 투자자들은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스페이스X 등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금액과 평가차익 규모까지 구체적인 수치를 요구하며 질의를 쏟아냈다. 이에 대해 경영진은 스페이스X 관련 투자액과 평가이익을 수치로 제시하고, 글로벌 전략가(GSO)의 역할과 보상 체계까지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약속하며 주주들의 질문에 정면으로 답했다.
주주총회는 기업이 성과를 과시하거나 직원들을 동원해 의결권을 ‘방어’하는 자리가 아니다. 주주로부터 경영권을 위임받은 대리인들이 그간의 성적표를 보고하고 향후 전략에 대해 ‘검증’ 받는 엄중한 자리다. 밸류업 정책이 강조하는 것처럼, 상장사는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한 중장기 계획과 지배구조 개편 방향을 이사회에서 숙의하고, 이를 주주에게 성실히 설명할 책임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업계 리더로 인정받으려면, 1조원의 순이익에 걸맞은 수준 높은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주인인 주주를 계단 단상으로 내몰고 20분 만에 끝내는 ‘속전속결 주총’은 밸류업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행태에 가깝다. 밸류업은 장부상의 숫자가 아니라, 주주의 자리를 보장하는 기본적인 예우와 투명한 소통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