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의자 좀 갈아야겠네요. 방충망은 바람 잘 통해요? 화장실은 불편한 데 없으셨죠?”
24일 오후 4시 서울 양천구 목2동 경로당. 어르신들의 사랑방에 익숙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방문객 7명 모두 초록색 모자와 조끼 차림이다. 반가운 인사도 잠시, 어르신들 사이에서 하나둘 쌓아둔 말이 쏟아졌다. 수리가 필요한 방충망과 환풍기부터 오작동되는 가스누출경보기까지. 휴대전화로 미리 찍은 사진과 함께 설명을 이어가는 어르신 바로 곁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이어졌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양천구 자율방재단’이다.
자율방재단은 ‘자연재해대책법’과 ‘양천구 지역자율방재단 운영 등에 관한 조례’에 근거해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방재 조직이다. 현재 양천구에만 총 315명이 활동 중이며, 목2동에는 18명이 소속돼 있다. 목2동 자율방재단은 여름철이면 침수 취약지역 점검과 함께 무더위쉼터 운영 상태를 확인하고, 어르신들의 안부도 함께 살핀다. 대부분의 단원들은 오랜 세월 이 마을에서 살아오며, 골목길 하나하나를 몸으로 익혀온 주민들이다.
43년째 목2동에 살고 있는 정영자(59) 단장은 자율방재단이 생긴 초창기부터 15년째 함께하고 있다. 정 단장은 “결혼한 두 딸도 목2동에 자리를 잡았다”며 “자율방재단처럼 동네에 애정을 가진 주민들이 직접 관리하면서 젊은 사람들도 살기 좋은 동네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함께 활동하는 단원 중엔 현직 통장이나 전직 통장도 많다. 이들은 단순한 시설 점검을 넘어 마을을 돌보는 생활 안전망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이날 무더위쉼터에서는 총 6건의 민원이 접수됐다. 단원들은 현장에서 불편 사항을 기록하고, 자치구와 바로 연결해 조치를 요청했다. 단원 활동 2년 차를 맞은 정봉섭(65)씨는 “불편한 게 있는지 직접 물어보고, 예산이 부족해도 방법을 찾아보려 고민한다. 어르신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여름을 보내시려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한다”며 “그래서 늘 어른을 공경하고, 시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한다”고 말했다.
자율방재단의 발걸음에 어르신들도 반가움을 표했다. 무더위쉼터를 자주 이용한다는 황추월(81)씨는 “방재단에서 이렇게 한 번씩 나와 점검해 주니까 쉼터가 늘 좋은 상태로 유지된다”며 “그 덕분에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모(82)씨도 “요즘엔 다른 동네에서 땅 꺼지는 사고도 있어서 걱정됐는데, 누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쉼터 현관을 나온 자율방재단은 서둘러 장갑을 착용하고 집게를 들었다. 다음날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어 빗물받이 점검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골목 곳곳 배치된 하수구 뚜껑을 열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가 보였다. 그 아래 빗물받이가 가려져 있었다.
청소를 시작한 지 30분 만에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가 거의 가득 찼다. 정 단장은 “담배꽁초가 특히 많다”면서 “하수구가 냄새난다고 뚜껑 위를 매트로 덮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장마철엔 오히려 침수 원인이 될 수 있어 순찰할 때마다 계속 설명해 드린다”고 말했다.
양천구 자율방재단은 지난해에만 422회의 활동을 펼쳤고, 연인원 3300명이 참여했다. 빗물받이·무더위쉼터·지하차도 등 여름철 취약 시설은 물론이고, 겨울철 한파, 감염병 방역, 지역축제 안전관리까지 활동 영역은 사계절 전방위적이다. 이밖에 동별 방역 활동, 안전 취약지역 순찰, 화재 등 재난 현장 복구 지원, 지역 행사 안전관리 등에도 참여하고 있다.
목2동의 안전은 양천구가 관리한다. 하지만 구청과 시민 사이를 연결해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건 자율방재단이다. 급여도 혜택도 없지만 자발적으로 회의를 진행해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은 활동한다. 평소 5~10명의 단원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살기 좋은 동네는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직접 만들어가는 거죠.” 정씨의 말처럼, 이웃들의 손길이 스며든 이곳의 여름은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