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호쿠 대지진 당시 나는 도쿄에서 외근 중이었다. 내 눈 앞에서 땅이 춤을 추듯 울렁거리고 빌딩이 흔들렸다. 서 있기 조차 힘들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땅에서 소리가 나는 것도 그때 처음으로 들어봤다. 그 충격과 공포의 순간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멜트 다운’이니 ‘노심용융’(원자로 내부가 녹아내림)이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낯선 용어들이 등장했다. 대지진과 쓰나미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누출의 영향을 일본 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농수산물에서 규제치를 넘는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면서 후쿠시마현을 중심으로 토호쿠 지방(후쿠시마 미야기 이와테 야마가타 아키타 아오모리 등 도쿄의 동북쪽 6개 현)의 1차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토호쿠 농산물을 사용하는 외식업체 리스트가 나돌았다. 마트 매대에서도 한동안 후쿠시마 농산물들은 전부 사라졌었던 기억이 난다. 남쪽 간사이 지방이나 큐슈 지방의 친척들에게서 농산물은 물론 물까지 부탁해 받던 사람들이 많았다. 방사능 측정기도 불티나게 팔렸다. 나 역시 한동안은 미국산 쌀을 구해다 먹었다. 비싼 수입 생수를 굳이 먹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어느 사이 12년이 지났지만 방사능 누출로 인한 먹거리 불안은 적어도 나에게는 현재진행형이다.
먹어서 응원!? 섞어서 응원중인 현실
일본 소비자청에서는 매년 풍평피해 소비자 인식 조사를 한다. 풍평(風評)이란 악질적인 헛소문을 말한다. 올해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방사능 오염을 후쿠시마현의 식품 사먹기를 주저한다는 응답이 5.1%였다. 조사가 시작된 2013년 2월의 19.4%에 비하면 크게 줄었다.
후쿠시마 현은 예전부터 쌀과 술, 원예 작물로 유명했다. 특히 후쿠시마산 쌀은 품질이 좋아 백화점에서 잘 팔리는 이른바 명품쌀이었다. 후쿠시마현의 발표에 따르면 대지진이 일어난 지 12년이 지난 현재 후쿠시마산 쌀의 30%는 지역에서 소비되고 나머지 70%가 업무용 쌀로 후쿠시마 바깥에 팔려간다. 가정용 판매는 원전 사고 전보다 5분의1로 줄었다. 대신 해외 수출이 외국의 일식당을 중심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업무용 쌀이란 식당이나 급식, 즉석밥 제조에 쓰는 쌀인데, 여러 지역의 쌀을 섞어 쓰면 원산지를 표기할 필요 없이 ‘국내산’이라고만 쓰면 되도록 식품표기법에서 정했다. 실제로 일본에서 덮밥 프랜차이즈 식당 같은 곳을 가보면 ‘국내산 사용’이라는 안내문을 볼 수 있다. 대지진 이전에는 맛이 없어 저렴했던 군마나 홋카이도 생산 쌀을 혼합미로 썼다. 후쿠시마산은 명품이었기에 다른 지역 쌀과 섞어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혼합미가 군마 홋카이도 그리고 후쿠시마 쌀이다. 군마·홋카이도 쌀은 맛이 없어서 싸고 후쿠시마 쌀은 맛있는데 싸다. 방사능 안전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싼 가격과 적당한 품질의 업무용 쌀로는 안성맞춤이다. 후쿠시마 농산물을 먹어서 응원하자고 하지만, 현실은 ‘섞어서 응원’ 중인 셈이다.
일본에 산다면 이제 후쿠시마산 농수산물을 피하기는 어렵다. 섬나라인 이 곳에서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보내기 시작했으니 후쿠시마 먹거리만 피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게 되었다.
오염수는 방류. 오염토와 폐기물은?
일본에 사는 입장에서 오염수보다 더 걱정되는 문제가 있다. 오염토와 막대한 폐기물이다. 원전 사고 피해 지역에선 방사능 오염물을 제거하는 제염 작업을 12년간 진행했다. 제염 작업이란 이미 방사능에 유출된 주변 흙과 건축 폐기물을 걷어내는 일이다. 올해 4월 시점에 이미 도쿄동 11개를 가득 채울만큼 오염토와 폐기물이 쌓였다고 한다.
오염토와 폐기물 처리 역시 섞어서 응원하는 방식으로 추진하려나 보다. 일본 환경성은 후쿠시마현 바깥 지역에 오염토와 폐기물로 화단 잔디광장 주차장 등을 조성해 주변 방사선량 변화를 측정한 뒤 제염된 오염토를 공공시설과 농지에 재사용하겠다고 밝혔다. 2045년까지 1500만톤 이상의 오염토와 폐기물을 후쿠시마현 바깥으로 실어다 나른다고 한다.
가까운 미래에는 어쩌면 후쿠시마산 농수산물들이 거꾸로 안전한 식품으로 매대를 당당하게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 방사능 검사를 하는 식품은 후쿠시마 산 뿐이니까.
김동운
1978년 서울출생. 일본계 모터싸이클 회사의 한국지점 입사를 계기로2008년 일본으로 넘어와 글로벌 IT기업의 마케팅부서에서 근무하며 한일 양국에 한 발씩 걸친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현재거주지는 시노노메(東雲). 김동운은 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