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기자의 now & then [1회]  - 옛 사진기와 시간 여행 떠나다.

라떼기자의 now & then [1회]  - 옛 사진기와 시간 여행 떠나다.
‘기자와 같은 나이 카메라 메고 길 떠나’
흑백 풍경 속에는 그리움과 향수가 가득 배어 있다. 쿠키뉴스는 오래 전 시간이 멈춘 듯한 정겨운 고향 마을과 도시 개발로 얼마남지 않은 골목풍경, 근대문화유산, 전통의 맥을 잇는 사람들을 찾아 ‘레트로 감성 여행’을 떠난다.

-‘흑백 풍경’에 담긴 아날로그 라이프
-추억의 편린들 흑백필름에 차곡차곡 담아
-6~70년대 풍경 간직한 감성 여행지 ‘청도 유천마을’
[쿠키뉴스] 경북 청도/ 글·사진 곽경근 대기자= 코로나 팬데믹이 비대면 서비스·기술 발전을 앞당기면서 최첨단 디지털 제품이 성찬(盛饌)을 이루고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여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메타버스(Metaverse)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라떼기자의 now & then [1회]  - 옛 사진기와 시간 여행 떠나다.

‘흩어지면 살고 모이면 죽는’ 엉뚱한 세상에 살며 어디엔가 남아 있을 옛 추억과 향수 가득한 풍경을 찾아 옛 카메라에 담아 보면 어떨까? 시간이 멈춘 풍경 속에서 전통 풍습과 먹거리, 일터를 지켜내고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귀 담아 들어 보자.

-라떼기자, 옛 사진기 꺼내다.
라떼기자의 now & then [1회]  - 옛 사진기와 시간 여행 떠나다.
photo by wang bo hyun

낡은 통가죽 가방에 곱게 모셔두었던 낡은 기계식 필름카메라 2대를 꺼냈다. 노출계조차 없어 경험과 감(感)으로 노출을 계산해야해서 ‘뇌출계 카메라’로도 불리는 1958년생 독일제 ‘35mm 자이스 이콘 콘타플렉스(ZIESS IKON Contaflex) 카메라’다. 기자와 연식이 같다. 다른 한 대 역시 같은 회사 제품이지만 무려 20년이나 앞서 생산된 ‘120mm 이코플렉스 이안 렌즈 카메라’다.
스프링이 풀리며 ‘샤악’하는 셔터소리가 손끝을 통해 묘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기계식 카메라다. 노출부터 초점 맞추기까지 풀 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지털 카메라와는 비교불가이다. 렌즈의 성능 역시 많이 부족하다. 초점과 노출을 일일이 양손으로 돌려가며 맞추다 보면 순간 포착은 거의 불가능하다. 색감이나 밝기, 콘트라스트는 물론 거리 맞춤도 산뜻하지 않다. 그래서 더욱 빛바랜 앨범 속 풍경을 되살리기에 적합해 보인다.
쿠키뉴스는 오래 전 시간이 멈춘 듯 한 정겨운 고향 마을과 도시 개발로 얼마 남지 않은 골목풍경, 근대문화유산,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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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거리 초입의 '약방과 다방' 약방은 폐업해 문이 닫혀 있고 다방 역시 장사를 접은 지 오래됐고 개인이 산다.

[제1회] 시간이 비껴간 풍경 ‘경북 청도 유천마을’
- 오래된 정미소, 약방, 전파사, 다방, 담뱃가게 등 메트로 감성 자극…
“나 한창 때는 말이야, 한 달에 코카콜라를 600백 상자씩 팔았어, 청도군 전체에서 2등으로 장사를 잘했어, 우리 가게에는 없는 물건이 없었지, 돈을 정말 잘 벌어서 밤새 돈 세느라 바빴어.”, “차도 마을에서 내가 제일 먼저 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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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우리슈퍼로 이름을 바꾼 잡화상 전경

30살에 면허 따고 대구에서 230만원 주고 픽업차량을 샀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2억3천만 원은 될 거야, 동네사람들이 유천자동차 1호인 내 차 구경하느라고 난리가 났어, 그 차로 물건 싣고 골짜기 마을을 돌면서 배달해 줬어, 그 만큼 이윤도 많았고 보람도 컸지” 유천 마을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한 자리를 지키며 잡화상(현 우리슈퍼)을 운영해온 조만석(88)할아버지는 옛 이야기를 하며 목소리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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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석, 이상희 부부가 가게 안에서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조 할아버지는 "여기는 이제 아이들이 없어서 과자도 어른과자 밖에 없어, 그냥 동네 사람들 얼굴이나 보면서 산다"고 말했다.

“유천장이 설 때면 가게 안에도 사람이 가득했지만 가게 밖에도 길게 좌판을 벌이고 장사하는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북적 북적했어”라며 “우리 할아버지가 주판도 잘 놓고 셈이 밝아서 장사를 아주 잘 하셨어, 지금이야 뭐 평생 하던 거니까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거지,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참 좋았어,” 아내인 이상희(86) 할머니도 옛 이야기에 신이 난 듯 말을 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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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 향수 자극하는 유천거리' 유천거리로 들어서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7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유천마을은 근방의 11개 동네를 합쳐 부른 이름으로 한 시절 ‘유천장’은 밀양장과 청도장 못지 않게 번성했었다.

경상북도 최남단에 자리한 청도군 유천마을은 경북 청도군과 경남 밀양시를 가로지르는 동창천과 청도천이 만나 밀양강과 합류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유천마을은 청도읍 유호리, 내호리, 초현리, 사촌리와 경남 밀양시 상동면은 청도천, 동창천, 밀양강의 세 하천을 중심으로 도 경계를 이룬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유천마을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역로(驛路)가 존재했다. 이곳은 경부선 철도와 25번 국도, 58번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유천(楡川)마을’은 천변에 느릅나무(楡)가 우거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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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골목길' 유천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시 지은 적산가옥들도 여러채 남아 있다.

유천마을은 밀양에서 대구와 한양으로 통하는 영남대로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60~70년대 이 근방에서는 가장 번화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신 대구부산 고속도로가 마을 위로 지나고 철도를 직선화하면서 마을 중심에 위치했던 유천역도 밀양시 상천면으로 옮기고 이름도 상천역으로 바뀌었다. 유천의 10여개 부락에도 승용차가 늘고 교통이 편리해지자 사람들은 유천시장을 이용하기 보다는 인근 밀양이나 청도읍의 대형 쇼핑센터를 찾기 시작했다. 젊은이들도 일자리를 찾아 하나 둘 마을을 떠나면서 유천거리는 점차 활기를 잃어가더니 고장난 시간처럼 어느 순간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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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유천초등학교 운동회 모습' 현재 유천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3명에 불과하지만 마을이 번성했던 60~70년대에는 학생 수가 700~800명 이었다.(유천초 제공)

아직 남아있는 유천초교, 유천우체국, 유천파출소 등이 유천의 번성기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청도군은 일제강점기와 근대시기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유천마을을 근대문화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다.
유천거리는 옛 유천역이 위치했던 청도읍사무소 유호출장소 건너편에서 시작된다. 유천거리 초입의 유천우체국을 지나면서 60~70년대 거리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은 문을 닫고 폐업 상태지만 경명당 약방과 천일다방 간판이 정겹게 붙어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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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마을에서여러차례 이장도 역임한 마을 최고령 허영석 할아버지가 옛날을 회상하며 지난 시간 이야기를 풀어낸다. 허 어르신은 "유천마을은 기독교가 청도지역에 전파될 때 처음 뿌리 내린 지역이었고, 3,1만세운동과 항일운동도 어느 고장 못지않게 활발하게 펼쳤던 곳"이라고 전했다.

오래된 카메라에 첫 장면 담은 후 옆에 있는 담배가게를 촬영하려는 순간, 골목 안에서 나온 한 노인이 렌즈 안으로 들어왔다. 유천마을 최고령인 96세의 허영석 어르신이다. 건강을 위해 매일 자전거를 탄다는 허 노인의 자전거를 죄송스럽지만 잠시 멈춰 세웠다. “옛날에는 이 마을이 정말 대단했어, 마을에 탁주공장, 과자공장, 솜 트는 공장까지 웬만한 거는 다 있었어, 장날이면 사람들이 어깨를 서로 부딪히며 다녀야 할 정도였어, 이 동네에서 만세운동도 제일 크게 했구,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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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의용소방대에 보관 중인 옛 소방 물차

현재 유천거리와 주변마을에는 일제강점기와 5~60년대 지어진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어 낡은 앨범 속 그리운 풍경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일부 시 군에서 조성한 근대문화유산거리와 달리 개인이 생활하며 조금씩 손질을 한 것 외에는 유천거리는 인위적으로 보수나 개축을 하지 않았다. 유천 장날이나 쇼 단이 공연을 하는 날에는 문전성시를 이뤘던 옛 유천극장 만이 화재로 방치되었다가 재개관을 위해 리모델링을 마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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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차량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이지만, 신작로 양편에는 당시로는 제법 큰 건물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빈집으로 남아있는 2층 건물의 적산가옥으로부터 유리창으로 만든 미닫이 문 안으로 가게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잡화점을 흑백필름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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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뜻의 구생당약방 전경, 이 곳 역시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철공소, 구생당약방, 양조장을 개조해 만든 사료 판매소, 전자제품 수리점이었던 중앙소리사와 다방, 미장원, 박제된 듯한 기원, 담배가게 지금도 성업 중인 영신정미소 등 유천시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렬로 자리한다. 유천시장 한켠 유호의용소방대에 보관 중인 옛 소방 물차도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 간 몇 차례 주인은 바뀌었지만 골목 안 적산가옥에 자리한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마을 아주머니들 모습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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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판매소 간판이 걸린 '옛 양조장 건물'  유천마을은 일제강점기 당시 양조업으로 유명했다.

사료판매소 간판만 걸린 채 비어있는 양조장 건물 터에는 막걸리 통 등 술과 관련한 도구가 일부 남아있다. 유천은 오래 전부터 지역 특산주인 유천소주(楡川燒酒) 생산지로 한때는 6곳의 양조장이 성업했다고 한다. 나이든 주민들은 “유천소주는 빛깔이 맑고 특유의 향과 도수는 높았으나 뒤탈이 없는 순수 곡주로 인기가 높았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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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거리에는 일제시대, 근대시대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다.

양조장 맞은편의 ‘중앙소리사’ 역시 기성세대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현재 문을 닫아 자물쇠로 채워져 있지만 유리창 안에는 오래된 전자 제품 등 어릴 적 전파사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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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정미소 주인인 김말순 할머니가 정미소 입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1930년대 생산된 120mm 이코플렉스 이안 렌즈 카메라’로 촬영했다.

중앙소리사를 지나면 유천거리의 최고의 촬영 명소로 손꼽히는 영신정미소가 자리하고 있다. 1941년에 지어져서 지금도 그 모습이 유지하고 있다. 주인인 김말순(73) 할머니에 의하면 첫 주인이 지금 건물 안쪽에서 정미소를 시작한 역사로 따지면 100년 가까이 된 방앗간이라고 귀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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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정미소 내부’  농민들이 도정한 쌀을 옮기고 있다. 정미소 대들보의 상량문에는 ‘소화 16년(1941년)’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영신정미소는 지금도 성업 중이다. 김 할머니는 “요즘은 이곳도 쌀농사를 많이 안하고 딸기농사와, 미나리 농사를 주로 하면서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쁜 편”이라고 말한다. “쌀농사만 지어서는 4명이나 되는 자식들 공부시키기 어려워 40여 년 전 있는 거 모든 팔아서 영신정미소를 인수했어. 13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시동생하고 같이한다.”면서 “한창 정미소가 잘 될 때는 집 안 마당은 물론 도로변까지 쌀부대가 산처럼 쌓였었어.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우리 정미소를 찾는 주민들이 많아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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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마을의 영신정미소는 흑백사진가들이 숨겨논 찰영 명소이다. photo by wang bo hyun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영신정미소는 사진가들에게는 훌륭한 작품 소재이다. 사진동호회나 개인 작가들이 자주 찾아와 귀찮을 듯도 한데 김 할머니는 성품이 어질다. “멀리서 소문 듣고 별것도 없는 여기까지 찾아와 주는데 내가 고맙지, 일하는데 방해만 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사진 찍어가서 우리 마을 소개해 주면 좋지, 나도 그동안 모델 많이 했어”라면서 아직도 고른 치아를 들어내며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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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의 대표 오누이 시조시인 생가' 오누이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이호우와 이영도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정미소 맞은편은 시조문학의 대가 이호우, 이영도 남매 시인의 생가다. 청도군에서는 남매 시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들의 문학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문학관 건립을 위해 생가를 복원 중이다.

옛 유천극장 영사기사 이지춘 씨를 만나다.
-‘시네마 천국’처럼 마을의 옛 풍경을 그리다.
-나는 갈테야 나는 갈테야 유천강 맑은 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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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유천극장 영사기사 이지춘 씨가 유천극장 시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결혼 당시 "장인 어른이 도시물도 먹고 옷차림도 그렇고 영사 기사는 한량이다. 아내가 고생할 것이라며 반대했다"고  말했다

유천마을 총무 일을 보는 이지춘(74· 내호리)씨는 맥가이버로 통한다. 젊었을 때부터 눈썰미와 손재주가 남달랐다. 가제도구나 농사도구가 망가지면 마을 사람들은 의례 이지춘 씨를 찾는다. 농사일에 바쁠 때에도 어른들이 부르면 바로 달려가 민원을 해결하는 만능 수리사다. 일흔이 넘은 나이이지만 어느 고향 마을과 같이 젊은 측에 든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 노는 모습을 본지가 언제인지 가물거린다. “유천마을 뿐 아니라 우리 세대가 모두 죽고 나면 청도군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어. 걱정이지” 이지춘 씨는 잠시 허탈해한다. 화제를 바꿔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청했다. 이지춘 씨는 유천마을 전성기인 60~70년 때가 자신의 전성기라고 말한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고 근방의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유천극장의 영사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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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거리 내 참기름 집에 가을이 되자 기름을 짜러 온 할머니들이 모여 있다. 

6,25 전쟁 이후 농촌에서의 삶이란 누구나 그렇듯 어린 이지춘에게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상이군인 출신의 아버지는 술로 낮밤을 지새웠고 어머니 밀양 어물전에서 생선을 구입해 유천역 앞에서 장사를 했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남은 생선은 밤늦도록 가가호호 다니며 팔아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늘 곤궁한 삶이었다. 학교 월사금 밀리는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3학년 때 육성회비 5환을 못 내서 1년을 쉬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이지춘은 무작정 석탄화물차에 몰래 올라타 부산으로 갔다. 도회지로 가면 일도 있고 배울 것도 먹을 것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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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충무로역 지하철 내부에 전시 중인 1960~80년대 한국을 대표했던 영화 포스터

16살 때 극장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시작해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이면 무엇이든 일을 했다. 하지만 도시는 시골 소년에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눈썰미와 손재주를 인정받았지만 제대로 된 기술을 배우진 못해 친척의 소개로 대구로 갔다. 당시 극장에서 최고 기술자는 영사기사였다. 그는 영사기사의 잔심부름은 물론 신발까지 닦아주며 영사기술을 익혔다. 극장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1년 만에 기술을 익혀 대구 송죽관이라는 영화관에서 꿈에 그리던 영사기사가 되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고향에 내려와 유천극장의 영사기사를 하면서 도시에서 온 최고 멋쟁이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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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장날이나 쇼단이 공연을 하면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유천극장 전경'  마을이 쇄락하면서 문을 닫았지만, 최근 개축을 통해 옛 모습 일부를 복원하고 상영을 기다리는 상태다.

‘차르르 차르르’ 어둠속 영사기를 타고 흐르는 영화필름 감기는 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을 맴돈다. 젊은 시절 K-pop이나 연예인이 따로 없던 시절 이지춘 씨는 잘 생긴 외모에다 영사기사란 특별한 직업을 가진 마을 최고의 연예인이었다. 당시 유행하는 옷을 차려입고 거리로 나서면 인기만점, 유천마을 아가씨들이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영사기사의 장점이 영화를 보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처럼 이지춘은 행복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우리가 결혼한 70년대 초만해도 유천거리는 타지에서 영화를 보러 올 정도로 밀양과 청도 못지않게 번성했다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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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거리의 상점 중에는 여전히 영업을 이어가는 곳도 있고, 정겨운 간판은 남아있지만 폐업을 했거나 제 기능을 잃어 창고나 개인 주택으로 용도가 바뀐 곳도 있다.

“나는 갈테야 나는 갈테야 유천강 맑은 물에 은어가 놀아주고, 운문사 저문 종이 속삭여준다.”는 허경국 작곡가의 ‘나는 갈테야’는 노래 가사이다. 이 씨는 노래 가사처럼 결혼 후 타지 생활을 접고 고향에서 렌트카 사업을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산골마을까지 태워다 주고 관광도 다니고 돈도 벌고 재미도 있었다. 88올림픽 때는 이태리 국가대표팀 버스 운전을 했다. 성실하게 일해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사람들과 관광에 나섰다가 험한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나선 렌터카 사업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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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거리 내 철공소 전경" 유천마을은 살아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이다.

50대 초반에 시작한 딸기농사로 이제는 안정된 삶을 산다. 육묘부터 시작해서 체계적으로 딸기 농사의 전 과정을 다한다. 이 총무는 “역시 사람은 땅을 파서 먹고 살아야 한다. 농사일이 최고다. 몸을 움직인 만큼 수확이 있다.”면서
“딸기 모종을 가꾸고 심고 수확하는 일이 제일 행복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유천마을이 된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이라며 활짝 웃는다.
청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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