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흥 강국’이 밀집한 중동 시장에서 문화·예술 영역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른바 ‘오일머니’로 대변되는 중동에서도 카타르는 손꼽히는 천연 가스 보유국 중 하나로, 경제 위기 속에서도 압도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다.
‘부자 나라’ 카타르의 고민은 국가를 대표할 만한 문화 유산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스포츠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당시 카타르는 약 2200억 달러(약 264조원)를 쏟아부어 ‘중동 첫 월드컵’을 성공 개최했고, 카타르 왕족인 나세르 알 켈라이피는 ‘챔스’ 우승 염원을 드디어 올해 이뤘다. 나세르 알켈라이피는 이강인이 뛰고 있는 파리 생제르맹(PSG) 구단주로, 지금까지 선수 영입에만 총 19억 유로(약 3조원)를 투자했다.
최근에는 문화로 눈을 돌리는 모습이다. 카타르는 ‘카타라 문화마을’을 만들고 이곳에서 각종 전시를 유치하고 있다.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 건립된 카타라 문화마을은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곳’으로, 전통 이슬람 건축 양식을 기반으로 하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예술과 문화를 아우르고 있다.
세계적으로 ‘핫한’ 이곳에서 오는 10월1일부터 11일까지, 그러니까 대한민국 민족 대명절인 ‘추석’ 연휴 기간에 ‘한국의 달’을 주제로 개인전이 열린다. 주인공은 ‘K-수묵’을 대표하는 류재춘 작가다. K-수묵이란 한국 전통 회화인 수묵화 기법을 바탕으로 현대 미술 기법과 재료, 감성을 접목해 새로운 느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장르다.
앞서 언급한 카타라 국립 문화마을 재단 측에서 류재춘 작가를 콕 집어서 공식 초청했다. 이 전시는 카타라 문화마을 47빌딩 국립미술관에서 1관과 2관, 총 2개 관에서 성대하게 펼쳐진다. 류재춘 작가 대표작 실물 전시는 물론, 미디어 전시도 병행된다. 류 작가의 활발한 활동으로 ‘백남준의 달과 류재춘의 달’을 논하는 평론이 인기를 끌었을 정도라서 미디어 전시 또한 기대를 모은다.

지난 7일 파주의 화실에서 쿠키뉴스와 만난 류재춘 작가는 “카타르 왕실에서 운영하는 문화마을 재단으로부터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배제하고, 류재춘 작가를 초청한다’는 공식 초청장을 받았다”고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사실상 ‘문화 대사’로 국빈 초청된 격인데, 코로나 이후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문화·예술계가 크게 위축된 현재 국면에서 큰 경사이자 쾌거다.
카타르 왕실과 류재춘 작가의 인연은 5년 전부터 시작됐다. 카타르 왕족인 모하메드 알 하이키 주한 카타르 대사는 지난 2020년 K-수묵 대표 화가인 류재춘 작가의 수묵화를 우연히 접한 이후 그야말로 ‘찐팬’이 됐다. 이때부터 카타르 왕실에 ‘류재춘의 수묵화’가 소개되기 시작했고, 2021년에는 카타르 대사관 후원으로 대한민국 국회에서 류재춘 작가의 전시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2021년 전시 당시에는 코로나 시국이라 아쉬움이 많았어요. 모하메드 알 하이키 주한 카타르 대사님이 제가 작업을 하는 화실에 들러 친필로 직접 카타르에서 전시를 다시 열어주겠다는 편지를 써주셨죠. 그 약속이 올해 실현되는 거예요.” (류재춘 작가)
카타르 왕족, 알 하이키 대사의 마음을 움직인 작품은 바로 ‘월하(月下)’였다. 이 작품은 류재춘 작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데, 특히 NFT로 ‘민팅(디지털 자산을 대체불가능토큰으로 변환)’된 이후 순식간에 완판된 일은 업계에서도 화제였다. 200점이 모두 완판됐고, 이후 4000명이 넘는 사람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가격도 치솟았다는 후문이다. 류 작가는 “류재춘보다 더 유명한 작품”이라며 웃었다.


대표작 월하가 탄생한 계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류재춘 작가는 “작가는 일반인과 감성이 조금 다른 것 같다”면서 “현실보다 이상을 추구하고, 감정에 충실하다”고 운을 뗐다. 이어 류 작가는 “당시 그림에 대해 엄청 고민할 때였는데, 먹으로만 그림을 그리다 처음으로 ‘보라색’이 들어왔다”면서 “산속에 무작정 들어가 3일 밤을 새면서 보라색을 체감하고 나니, 온 세상이 보라색으로 변했다”고 회상했다.
달은 여성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동양 미학을 상징하기도 한다. 꿈을 꾸면서까지 영감을 얻으면서 달을 그리는 데 몰두한 류 작가는 마침내 “류재춘의 달이 떴다”고 표현했다. “그림을 그릴 때, 우선 저를 감동시켜야 하는데 어느 순간 꿈속에서 달이 떴다”는 류 작가는 “한국의 달에는 우리 모두의 소원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류 작가는 “월하게 저에게 온 것은, 제 안에 있던 달을 꺼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적인 언어인데, 실제로 류 작가는 도록에 직접 작품을 은유하는 시를 쓰기도 한다. 류 작가의 시는 그의 작품 만큼이나 아름답고 함축적이면서 마음을 끌어당기는 데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중동 역시 일종의 ‘달 문화권’이라는 점이다. 류 작가는 “카타르 국왕모가 달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면서 “(카타르 왕실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아 전시를 열게 된 것이) 저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23년 삼청동 전시 당시에도 ‘한국의 달’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했는데, 이번에 카타르에서 세계적으로 한국의 달이 재탄생하게 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류 작가는 새로운 작업, 참신한 시도를 많이 하는 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도 “평생을 시도하고 실험하는 작가”라고 평한 류 작가는 “대학교 4학년 때 소논문 식으로 간단히 레포트를 쓸 때 작가 탐방으로 피카소를 공부했다”면서 “변화무쌍하게 화풍이 변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복기했다. 전통 화가들이 주저하는 미디어 전시에도 거부감 없이 이를 기획·주도하고, 작품 NFT를 민팅해 완판시키는 저력이 여기서 나왔다. 류 작가는 “피카소가 현대를 살면, 누구보다 먼저 NFT와 미디어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K-수묵을 선두에서 이끄는 대표 작가로서 청사진도 그렸다. 류 작가는 “우리 전통 수묵화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확장되어야 한다”면서 “전 세계로 확산하기 위해서 K-수묵이 미디어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진행했다”고 역설했다. 이번 카타르 전시에서도 1관과 2관으로 나눠 미디어 전시를 병행하는 이유다. 미디어 작품 또한 기획 단계부터 류 작가의 심모원려가 깃들었다.
일반 미디어 아트와 류 작가가 이번에 선보일 전시에는 큰 차이가 있다. 류 작가는 “미디어 아트는 기술만으로 하지만, 제가 K-수묵이라고 표현한 작품들은 모두 원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면서 “마지막에 원화 작품이 반드시 나온다”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한국화에 대한 류 작가의 철학도 확고했다. “우리나라 옷이 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한복이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저는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진화시켜서 아무 거부감 없이 서양, 중동 누구라도 그 작품을 소장하고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아울러 카타르 전시에서도 한국의 달은 우리 모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글귀가 걸렸다. 한국하면 달, 한국화는 류재춘이라는 이름이 이번 전시를 통해 세계에 각인될 전망이다.
류 작가는 “제가 생각할 때 저는 한국의 작은 여자, 그냥 그림 그리는 작은 사람이지만 제가 갖고 있는 사랑은 큰 것 같다”면서 “그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 월하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약 2m에 달하는 이 그림을 류 작가는 두 달에 걸쳐 그렸다. 이 작품은 이제 카타르를 시작으로 세계로 뻗어나갈 채비를 마쳤다.
한편 한국화는 현재 위기다. 대학 미술과 중 한국화과는 계속 폐과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류 작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명을 다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다. 류 작가는 “대학 강단에 서고 싶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주고 싶다”면서 고전적인 것, 그림 원론을 가르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미래 비전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작가로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류 작가는 “저 역시 미술학원도 하고 개인 레슨도 하고 학교에서 강의도 했다”면서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은데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기다보니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류 작가는 “기업과 컬래버도 하고, 해외에도 나가면서 브릿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선생이 있다면 학생들이 그 밑으로 자연스레 모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나라 수묵화의 위기, 한국화의 위기를 스스로 K-수묵의 대표가 되는 것으로서 극복해나가겠다는 류 작가의 자신감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끝으로 류 작가는 “언젠가 저는 세상에 없지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품을 남긴 작가로 기억 되고 싶다”면서 “문화 강국 대한민국은 K-수묵으로 시작된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