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52)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52)

큐비즘으로 이끄는 <거투르드 스타인의 초상화>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 초상화, 1905-6, 캔버스에 유채, 100x81.3cm,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이 초상화의 모델인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은 자서전에서 “피카소는 작은 의자에 앉아 캔버스에 바짝 다가가서 팔레트에서 갈색과 회색을 섞어가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묘사했다.

거트루드의 자서전은 우리에게 피카소와 몽마르트르에 있는 그의 춥고 좁은 스튜디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초기 모더니즘 초상화의 제작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피카소는 얼마 전 파리의 갤러리에서 자신의 새로운 그림을 발견한 컬렉터 거트루드를 만났다. 피카소는 이 미국인의 통찰력과 자유로운 정신에 감명받아 본능적으로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겨울 내내 피카소는 주철 난로에 불을 지피고 거트루드를 초라한 작업실로 맞이했다. 그녀는 따뜻한 갈색 코듀로이 드레스를 입고 부서진 안락의자에 앉았다. 피카소의 스튜디오는 방문객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매우 활기찬 곳이었다. 거트루드는 모델을 서며 마음이 맞는 새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침묵이 찾아오면 피카소의 뮤즈,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프랑스 시인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의 시를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1905년 가을부터 시작하여 당당한 체구의 거투르드는 90번 가까이 모델을 섰다. 평소 피카소는 그림을 빨리 그리기로 유명했으니 이는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1906년 봄, 피카소는 거트루드의 얼굴 표현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를 지웠다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해 가을,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거트루드를 보지 않은 채, 이 가면 같은 얼굴을 그렸다. 고대 이베리아 양식을 떠오르게 하는 이 얼굴 표현은 그해 여름 피카소가 고솔에 머물면서 착안했던 새로운 양식이었다.

피카소는 장밋빛 시기 화풍으로 그린 스타인의 몸에 큐비즘의 원형에 해당하는 두상 표현을 접목하여 독특하고 대담하며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거트루드는 피카소가 그녀의 얼굴을 칠하고 문지르며 몇 달 동안 좌절감을 느꼈고, 결국 완전히 막다른 길에서 분노에 사로잡혀 머리 전체를 칠하고 스페인으로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돌아온 후 얼굴을 다시 완성하여 거트루드에게 선물로 주었다. 초안과 완성작 사이에 피카소의 스타일은 엄청난 진화를 겪었다. 원래의 자연스러운 특징은 사라지고 얼굴은 이제 가면과 비슷해졌으며 뚜렷한 윤곽이 생겼다. 

동시대 예술가과의 경쟁을 넘어선 피카소는 자신이 라파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장들의 계보를 잇는다고 자처했다. 거트루드에게 "사람들은 내가 라파엘로보다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데 아마 그들이 옳을 거야"라 말했다. 데생을 가르치는 아버지를 둔 피카소는 걷기 전에 이미 데생을 하는 천재였기에 자부심이 넘쳤다.

완성된 초상화를 보고 거트루드의 친구들은 이전의 초상화와 전혀 다른 가면과 같은 얼굴에 당황했다. 피카소는 "모두 그녀가 초상화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괜찮아요. 결국 그녀는 초상화와 똑같이 보일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피카소는 자기가 가는 길이 어느 곳인지 잘 알고 있었고, 사람들을 설득해 그곳으로 이끌 자신이 있었다. 

피카소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앞에 앉은 거트루드 스타인, 출처: 뉴욕 메트로폴리탄

 거트루드는 레즈비언으로 평생 동반자인 작가 엘리스 B. 토클라스와 파리 플뢰뤼스 거리에서 살았다.   

펠릭스 발로통, 거트루드 스타인, 1907, 캔버스에 유채, 100.3 x 81.3cm, 출처: 볼티모어 미술관, 콘 컬렉션

거트루드가 피카소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있을 때, 피카소는 수줍은 스위스 출신의 화가 펠릭스 발로통(Felix Vallotton, 1865~1925)을 소개해 주었다.

발로통이 왜 이 초상화를 그렸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가 진행 중인 초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같은 주제를 직접 시도해 보기로 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발로통의 이전 모델들은 모두 친구나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대담한 시도였다.

세잔 역시 평생 그랬듯이, 모델과의 그런 친밀함은 발로통에게도 위안이자 도구였다. 거트루드는 발로통을 좋아했고, 다시 한번 초상화를 그리도록 동의했다. 

거트루드는 ‘발로통은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과 작업 기록을 가지고 있다’라 언급했다. 그는 크레용으로 스케치를 한 다음 똑바로 그리기 시작했다. 거트루드는 마치 ‘스위스 빙하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커튼을 내리는 것과 같았다’라 묘사했다.

초상화를 완성하기까지 약 2주가 걸렸고, 그런 다음 그는 초상화를 거투르드에게 주었다.

발로통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색을 허용했다. 피카소의 긴장되고 활기찬 붓놀림과 달리, 발로통의 터치는 균일했다. 그의 초상화는 한스 홀바인과 앵그르처럼 고전적이며 평이하다. 거트루드는 우아하지 않다고 불평하며 초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1907년 발로통이 살롱에 이를 출품하자 사람들은 분노했다. 비평가들은 ‘저속하고, 차갑고, 무감각한 묘사’로, ‘화려한 색상과 정밀한 사실주의가 부족하다’라 했다. 발로통의 평생 친구인 뷔아르(Edouard Vuillard)조차 그 초상화가 ‘베르탱 부인의 초상과 비슷하다’라 언급했다.

이 말은 현재 루브르에  소장된 앵그르의 작가 베르탱(Louis-François Bertin)의 유명한 초상화에 대한 재치 있는 비유였다. 사실, 거투르드의 두 초상화는 모두 앉아 있는 베르탱과 비교되었으며, 발로통의 초상화가 거기에 더 가까웠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 루이 프랑수아 베르탱의 초상, 1832년, 캔버스에 유채, 116 x 95cm, 루브르 박물관

발로통의 초상화에서 거트루드는 갈색 드레스를 입은 채 독일계 유대인의 육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피라미드 모양의 안정된 자세는 발로통이 실제로 관찰한 이미지보다 피카소의 초상화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1926년에 거트루드는 1만 프랑에 이 그림을 팔았는데, 이는 발로통의 다른 작품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금액이었다. 예술품의 가격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부분은 서사다. 누가 소장하고 있었는지 어떤 과정에서 이 그림이 탄생했는 지의 스토리가 그림의 가치를 더하는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거트루드의 두 초상화는 각각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6년 이후 한 지붕 아래 두 작품이 동시에 전시된 적은 없었으나, 2020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펠릭스 발로통: 동요의 화가 전시회>가 그들을 재회하게 만들었다.

<펠릭스 발로통: 동요의 화가 전시회>에 나란히 걸린 거트루드의 초상화

거트루드는 이렇게 말했다. "피카소의 장밋빛 시기는 내 초상화로 끝났다". 자신이 피카소 예술에서 입체주의로의 중요한 전환을 주도한 모델일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말이다.

거트루드는 1946년 7월, 유언장에 명시한 유일한 작품인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같은 시기, 같은 모델을 그린 두 화가의 초상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예술가로 미술사에 기록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카소의 작품은 모더니즘을 여는 중요한 걸작이나 펠릭스 발로통의 초상화를 기억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피카소는 자신만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다시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며 스스로 진화해갔다. 만일 그의 그림 세계가 청색시대로만 끝났다고 해도 그는 철저하게 파랑만 고집하며 그림을 그린 화가로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추구했던 하나 하나를 따로 놓고 보아도 각각 미술사의 큰 획을 그을 의미 있는 성과였다.

3년에서 5년 동안 철저히 하나에만 몰두한다는 피카소의 전략과 방식이 경쟁자들을 압도해버린 또 하나의 성공포인트가 되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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