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50)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50)

‘변형’으로 예술을 완성한 마티스

칼 반 베흐테놀(Carl Van Vechten), 앙리 마티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스페인 국경까지 멀지 않은 프랑스 남부의 콜리우르(Collioure)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에게 안식처 같은 어촌이었다.

그곳은 한때 스페인의 식민지였기에 아직도 이슬람 풍의 성채가 남아 있으며,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와 가까워 수세기 전부터 무역도 활발했다. ​  

앙리 마티스, 젊은 선원 1, 1905,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1905년에도 마티스는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과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북부의 카토 캉도라시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남부 콜리우르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 20세기 최초의 아방가르드 회화인 야수파(野獸派)를 탄생시켰다.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에서 미술 평론가 루이 보셀(Louis Vaxcelles)은 마티스, 블라맹크, 망갱 등의 작품들이 카무엥 마르케의 15세기 르네상스 풍의 조각을 둘러 싸고 있는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그는 “야수(野獸; Fauve)에 둘러 싸인 듯한 도나텔로(15세기 이탈리아 조각가)!”라 외쳤다. 

20세기의 미술 양식의 명칭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이다. 여기서 나온 야수주의(포비슴; Fauvism)라는 명칭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시의 논란이 그만큼 센세이셔널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야수파 화가들은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였고, 야수주의는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그들이 일으킨 새로운 미술 장르였다. ​

이듬해 콜리우르를 다시 찾은 마티스는 십대인 선원 카미유 칼몽(Camille Calmon)의 초상화를 그렸다. 처음에 그린 <젊은 선원 1>은 전통적인 형식을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점묘법과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약간 거칠었다.   

마티스, 젊은 선원 2, 1906,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똑같은 크기로 작업에 들어간 두 번째 초상화는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들었던 첫 번째를 모사한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붓을 들었다.

마티스는 <젊은 선원 1>에서 표현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곤 소년의 얼굴을 단순하고 강렬하게 윤곽선을 변형했으며, 인물의 실루엣과 옷의 주름 등 선은 몹시 과장했다. ​

첫 번째 그림에서 다양한 색으로 수채화처럼 엷게 칠한 배경은 두 번째 그림에서 분홍색으로 균일하게 처리했다. 또한 바지와 셔츠에도 색을 전부 채워 평면적으로 칠했다. ​

마티스는 자신의 파격적인 시도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컸다. 그래서 마티스는 파리로 돌아가 미술품 수집가 리오 스타인(Leo Stein)에게 자신의 작품을 콜리우르 우체부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마티스의 친구이자 예술평론가인 메시슬라 골베르(Mecislas Golberg)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에서 모든 표현의 기본은 변형이다. 개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변형도 더욱 뚜렷해진다."

이는 마티스가 추구하는 바였다. 이에 마티스는 자신만의 표현기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강력하게 응축된 윤곽선과 대상의 비율을 왜곡하는 '변형'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마티스는 ‘예술은 표현에 관한 생각’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변형을 하면 할수록 작가의 의도가 명백해진다’는 역설에 공감했다. 나중에 수집가 리오 스타인은 <젊은 선원>의 두 번째 판본이 "첫 번째 그림을 억지로 변형시킨 것"이라고 혹평하며 구입하지 않았다. 마티스를 후원하던 스타인 가(家)의 맏형인 마이클(Michael)과 그의 아내인 세라(Sarah) 역시 첫 번째 판본만 구입했다.   

리오 스타인과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금테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른 리오 스타인은 학자 같은 인상을 풍긴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스물 여덟 살인 리오가 1900년, 여동생 거트루드 스타인과 함께 만국박람회를 관람하러 파리를 찾았다. 피카소도 같은 해에 처음 파리를 방문했다. 당시 리오 스타인은 삶의 목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는 유럽에 계속 머무르기로 작정했으며, 피렌체에서 미술사학자이자 감식가인 버나드 베런슨(Bernard Berenson)을 만나 우정을 쌓았다. 두 사람은 모두 하버드 대학의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교수 아래서 공부를 했다.

결국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리오는 파리에 살기로 결정하고 파리로 돌아갔다. 센 강 좌안에 자리한 플뢰리 거리의 아파트를 얻은 후, 그는 파리의 보물 같은 예술 작품에 흠뻑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수집가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리오의 열망은 뜨거웠다. 마티스의 스승이었던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학생이 그린 작품을 구입한 후 예술품 수집을 멈출 수 없었다.

그도 파리에 사는 유대인으로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므로 리오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품이나 무명작가의 것이거나 혹은 혁신적인 작품을 찾아 헤맸다.

자금을 마음껏 쓸 수 있을 만큼 풍족한 처지는 아니어서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만 했다. 그런 뒤 리오는 마네, 드가, 반 고흐,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등 작품을 수집하였다.

여동생 거트루드도 파리에 도착했다. 의과대학 시험에 낙제한 뒤,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했던 그녀는 이제 오빠와 함께 파리에 정착할 참이었다. 마침 그녀가 도착한 날은 제1회 살롱 도톤느 개막일이었다. 1903년 프랑스 화가 주르당을 리더로 마티스, 마르케, 루오, 뷔야르 등이 창립한 살롱으로 르누아르, 르동, 카리에르 등의 대가들이 지지하는 가을 전람회였다.

리오와 거트루드는 여러 번 방문해 작품을 보았다. 리오는 유망한 작품을 발굴하고자 열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거트루드의 예술 관련 지식은 여행자 수준이었다. 

이들 남매는 사람들에게 괴짜 같은 인상을 주는 커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티스와 피카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으며 미술사에 등장한다. 1904년 초, 리오의 형이자 거트루드의 큰 오빠인 마이클이 아내 세라와 함께 파리로 왔다.

리오와 거트루드의 집 근처에 아파트를 구했다. 이들이 파리에서 컬렉션을 하며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버지가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사망하여 유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예술가들과 거투르드 스타인의 아파트가 등장하는 우디 앨런이 감독한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 영화가 있다. 감독의 1920년대 서양예술에 대한 동경을 담아낸 영화는 이렇게 전개된다.

할리우드의 각본가 길은 약혼녀와 파리에서 미술관을 방문한다. 밤늦은 시간에 술에 취해 올라탄 푸조는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여 거투르드의 아파트에서 스콧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만난다. 두 작가는 월리엄 포크너와 함께 20세기 영미권에서 ‘미국의 황금시대인 재즈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위대한 갯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라 말하는 나가사와 선배를 통해 스콧을 극찬했다. 

영화에서 헤밍웨이의 연인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시대를 그리워한다. 1890년대의 파리에서 주인공 길은 로트렉, 드가, 고갱 등 예술가들을 만난다. 그러나 드가나 고갱은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여행으로 꿈꾸는 시대를 찾아갔지만, 그 시대의 예술가는 또 다른 과거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과거를 동경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된다. 지옥 같은 지금(Present)이라도 나중에는 선물(Present)이다. 오늘은 미래의 누군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과거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아파트 사진. 벽난로 위에는 폴 세잔의 < 부채를 든 세잔 부인>과 피카소의 <거트루드 스타인>이 있다,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마티스는 이차원의 평면에서 강렬한 색채의 사용과 선으로 변형을 시도했다면, 피카소는 삼차원의 조각적인 것에서 변형을 시도했다. 두 화가 모두 변형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변형을 하려면 누구도 하지 않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가들은 변형을 통해 성장해 가며, 예술의 변형은 삶에서 얻어진다. 그래서 예술과 삶은 하나이며, 남과 다른 작품은 남과 다른 인생의 결과물이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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