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 조정은 “당신에겐 무엇이 가치 있나요” [쿠키인터뷰]

‘레미’ 조정은 “당신에겐 무엇이 가치 있나요” [쿠키인터뷰]

뮤지컬 배우 조정은. 사진=박효상 기자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았다. 딸을 여관에 맡기고 돈을 벌러 공장에 다녔다. 그마저도 추근대던 감독관 눈 밖에 나 금세 잘렸다. 딸에게 돈을 보내려면 뭐든 팔아야 했다. 처음엔 목걸이, 다음은 머리카락, 그 후에는 생니, 결국 몸까지 팔았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레미제라블’ 속 판틴은 제목 그대로 ‘비참한 사람(들)’이다. 배우 조정은은 판틴이 “순수하게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봤다. 수렁 속에서도 “다시 그가 날 찾아와 함께할 삶”(대표곡 ‘아이 드림드 어 드림’)을 바라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을 맡은 조정은을 29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만났다. 동명 소설을 각색한 뮤지컬이다. 조정은은 2013년 한국 초연과 2015년 재연 때도 같은 역할을 맡았다. 판틴으로 무대에 오른 횟수만 400번이 넘는다. 그런데도 “공연할 때마다 더 찾을 게 있다”고 했다. 특히 딸 코제트를 아끼는 마음이 절절해진단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 초연 땐 그걸 문자로 이해했다면 지금은 그 심정이 제게 와닿아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보단 내가 감정을 얼마나 담고 연기하는지가 중요해졌어요.”

‘레미제라블’ 속 판틴의 솔로곡. 조정은은 “관객들이 공연을 본다고 실감하기보단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들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노래하고 연기한다. 유튜브 채널 ‘더 피트 랩’

배우는 몸을 통해 이야기와 연결되는 사람. 조정은도 감각을 통해 판틴의 처지를 깨쳤다. 초연을 준비할 때 일이다. 판틴이 죽기 전 딸의 환영을 보는 장면을 연기하는데, 크리스토퍼 키 협력 연출이 조정은의 눈을 안대로 가렸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 자기 머리카락을 가져다 댔다. 볼 수 없는 딸을 향한 그리움이 손끝에서 시작됐다. 공장에서 멸시받는 기분도 몸으로 경험했다. “배우들이 제 주변을 돌면서 침을 뱉고 욕을 하게 했어요. 판틴이 겪은 치욕을 알 수 있었죠.” 공연장으로 출근해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얼굴에 흙칠을 하면 그는 200년 전 프랑스로 돌아간다.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란 생각에 “공연 한 번 한 번이 끝나는 것을 아까워하며” 무대에 오른다.

조정은이 마지막을 직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레미제라블’이 자주 공연되는 작품은 아니라서다. 게다가 “판틴은 너무 많은 걸 경험하면 안 되는 캐릭터”란다. 이번 시즌 오디션 때도 ‘(연기가) 익숙해 보인다’는 평가에 자신을 되돌아봤다. “아이러니예요.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 상태로 역할을 맡기엔 나이가 너무 찬 거죠. ‘레미제라블’도 그래요. 몇 년 후엔 가사의 의미를 더 잘 알겠지만 그땐 판틴을 못 하겠죠. 그래도 어떤 나잇대에만 가질 수 있는 감성은 분명 있어요. 그러니 (공연을) 할 수 있을 때 충분히 누리려 해요.”

조정은. 사진=박효상 기자

데뷔작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신인상을 받았고 관객이 뽑은 최고의 뮤지컬 배우 여우주연상도 두 번(2014, 2015년)이나 수상했다. 그런데도 조정은은 한때 “배우가 내 길이 맞나” 고민했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며 표현하느라 괴로웠고, 내 연기와 노래가 못마땅”했던 시간이었다. 조정은은 “작품을 쉬면서 ‘아무리 역할이 작더라도 난 여전히 배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했다”고 했다. 2014년 출연한 뮤지컬 ‘드라큘라’부터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고 알 때까지 물어보며” 작품에 천착했다. 그래서일까. 조정은은 표현이 과하지 않은데도 캐릭터의 심연까지 관객을 데려간다. 뮤지컬 팬들 사이에선 ‘조정은에겐 늘 설득된다’는 평가가 돈다. 다작(多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2021년 ‘드라큘라’부터 ‘지킬앤하이드’ ‘어차피 혼자’ ‘베토벤: 더 시크릿’ ‘레미제라블’까지 “소처럼 일했다”며 웃었다.

‘레미제라블’은 죽은 이들이 나타나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부르는 것으로 끝난다.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다. 조정은도 이때는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그는 “크리스토퍼 협력 연출은 이 노래가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질문을 던지길 바랐다”며 “‘레미제라블’은 ‘나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는가’를 묻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조정은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말했다. “‘레미제라블’을 하면서, 또 최근 개인적인 일(조정은은 최근 부친상을 당했다)로 죽음을 깊이 묵상하게 됐어요. 죽음이란 게 그리 멀리 있지 않더군요. 그 앞에서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사는가, 다른 이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내 영혼을 파는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됐어요. 내가 나로서 내 삶을 사는 것. 저는 거기에 가치를 두고 있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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