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곳곳에 도사린 안전불감증… 비상문 없는 소극장

[르포] 곳곳에 도사린 안전불감증… 비상문 없는 소극장

8일 오후 찾은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 가로 80㎝ 남짓한 철문을 열자 지하로 연결된 계단이 나왔다. 20여명이 들어서면 꽉 찰만큼 좁은 계단을 내려가니 바로 공연장 입구가 나타났다. 130명을 수용하는 이 공연장의 유일한 비상구다. 불이 나면 130명이 이 출입구 하나에 몰리게 된다. 다닥다닥 붙어 일렬로 배치된 좌석은 무릎이 앞좌석에 닿을 만큼 좁았다. 같은 줄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지 않으면 통로로 나갈 수조차 없는 구조다. 화재 발생 시 엄청난 혼란과 인명 피해가 초래될 게 뻔한 이런 구조의 소극장은 대학로에만 수십 곳이 영업 중이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으로 꼽히는 ‘안전 불감증’은 우리 주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언제 대형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소규모 공연시설, 해마다 늘어나는 산악 사고, 규제 완화를 빙자해 ‘을’이 ‘갑’을 관리·감독토록 한 대형건물의 이상한 소방안전 시스템까지 온통 편리와 효율만 앞세우는 사이 안전 의식은 쉽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비상문도 대피 안내도 없는 소극장들=같은 날 인근 다른 극장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지하 3층에 위치한 이 곳은 공연마다 최대 200명의 관객이 들어간다.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공연장 출입구에서 형광색 비상구 표지를 따라 걸어가니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문이 나타났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불이 났을 때 엘리베이터를 절대 이용하면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꼼짝 없이 200명이 지하에 갇히는 셈이다.

이 극장 관계자는 “관객들에게 공연 전 따로 화재 등 응급상황 대처요령을 설명하진 않는다”고 했다. 건물 관리자에게 소방 점검을 주기적으로 받는지 묻자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날 이 극장은 비상문 앞에 페인트 등 가연성 물질과 공사 자재까지 놓아 뒀다가 취재팀이 찾아가자 급하게 치웠다.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소극장은 아예 의자와 무대 등 모든 시설이 불이 번지기 쉬운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눈에 띄는 곳에 소화기를 배치해 둔 극장은 찾기 어려웠다.

이날 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나온 김시현(25)씨는 “공연장 출입문이 닫히고 조명이 꺼지니까 갑자기 ‘불이 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혼자 머릿속으로 그리며 불안한 마음으로 공연을 봤다”고 말했다.

◇음주 산행이 여가? 끊이지 않는 등반사고=음주 산행이나 무리한 등반도 안전 불감증의 대표 사례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서울의 산악 사고는 2011년 1292건에서 2012년 1317건, 지난해 1425건 등 매년 늘고 있다. 사망자도 2012년 17명에서 지난해 34명을 기록해 배로 뛰었다.

많은 사고가 술 때문에 일어났다. 지난 3월 북한산을 오르던 정모(56)씨가 향로봉 사찰에 있는 높이 4m 돌탑 위에 앉았다가 굴러 떨어져 크게 다쳤다. 당시 정씨는 술에 취한 상태였다. 산에 올라가 술을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여가 문화처럼 변질된 지 오래다. 주말이면 막걸리나 소주를 챙겨 산 정상에서 마신 뒤 하산하다 굴러 떨어지는 사고도 자주 일어난다. 산 중턱에 가면 아예 등산객에게 대놓고 술을 파는 상인들까지 있지만 단속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바위로 된 능선이나 경사진 암벽을 오르내리는 릿지 등반은 반드시 보호 장비를 갖춰야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 맨몸으로 도전한다. 암벽 등반 사망 사고가 잦은 북한산에는 지난해 11월부터 10개 암벽 등반 코스에 ‘추락사고 지점’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붙었다. 그러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이중 2개 코스에 카메라를 설치해 감시한 결과 등반객 10명 중 3명은 안전장비 없이 홀로 등반하고 있었다.

◇‘을’이 ‘갑’을 관리하는 이상한 대형 건물=1971년 크리스마스. 서울 중구 대연각호텔 화재로 163명이 숨졌다. 사상 최악의 대형건물 화재로 기록된 이 사고 이후 43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대형건물의 소방안전 관리 규정은 기형적이다.

현행법은 대형건물의 건물주가 소방안전 업체를 자율적으로 지정토록 하고 있다. 스프링클러와 방화문, 탈출구 등 모든 소방안전 시설을 ‘갑’인 건물주가 고용한 ‘을’ 업체가 총괄하는 식이다. 안전관리 업체가 “대피시설에 문제가 있으니 돈을 들여 공사하라”고 권고해도 건물주가 거부하면 그만이다. 업체들은 건물주와 계약을 이어가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용을 최소화한 개선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예전에는 각 소방서 소방대원들이 소방시설을 중심으로 관할 지역 건물들을 전수 점검했지만 2012년 2월 자율안전 규제가 도입되면서 상황이 이같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일선 소방서 관계자는 “많은 대형건물이 대피로 확보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다”며 “자신의 건물을 깐깐하게 점검해 돈 쓰게 만드는 업체와 재계약하려는 건물주가 얼마나 되겠냐”고 지적했다.

정부경 박세환 박요진 기자 vicky@kmib.co.kr
정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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