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언어 표현 인정한 판결…탈시설 논쟁 전환점 될까

비언어 표현 인정한 판결…탈시설 논쟁 전환점 될까

장애인 단체 “비언어 표현 인정, 결정권 존중한 판결”
서울시 “정책 기조 유지…복지부 방향에 맞춰 조율”

지난해 4월 ‘서울시 장애인 탈시설 지원 조례 폐지’ 촉구 집회가 열렸다. 이예솔 기자

“‘의사소통’이란 문어·음성언어·단순언어 등 보완 ‘대체적 의사소통의 방식’을 포함한다.”

중증장애인이 언어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본인의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퇴소 과정에서 당사자의 ‘표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이어졌던 가운데, 이번 판결은 오랜 쟁점에 분기점을 찍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판사 김영민)는 A 사회복지법인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권고결정 취소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16일 밝혔다. 재판부는 중증장애인 B씨가 비언어적 방식으로 퇴소 의사를 표현했다고 보고, 인권위가 제기한 ‘의사 확인 없이 이뤄진 퇴거’라는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A법인은 지난 2013년부터 진행된 서울시의 장애인 탈시설 계획에 따라 2014년부터 수용형 장애인 거주시설을 폐쇄하고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 생활을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2021년 B씨 등 13명의 장애인을 지원주택으로 옮기고 시설을 폐쇄했다.

논란은 인권위가 이 과정에서 의사결정 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재발방지 대책을 권고하면서 불거졌다. 인권위는 B씨가 장애의 정도가 심한 뇌병변·지체·지적·중복장애를 가진 점에 비춰 “A가 퇴소와 관련한 본인 의사의 정확한 확인 없이 B씨를 퇴소시킨 것은 주거이전의 자유 및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협약 제2조는 ‘의사소통’이란 문어·음성언어·단순언어, 낭독자 및 접근 가능한 정보통신 기술을 포함한 보완 ‘대체적 의사소통의 방식’ 등을 포함한다”며 “B씨는 행동 등을 통해 퇴소 결정에 동의했고, A법인은 충분한 설명과 지원을 제공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법원은 “퇴소 이후 B씨의 의사 표현 능력과 활동 능력이 오히려 향상됐다”며 인권침해라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현행 발달장애인법에서도 ‘당사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사결정에 필요한 지원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이번 판결은 이러한 법적 기준에 부합하는 조치를 취한 기관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자립지원 현장에서 유의미한 판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김치훈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장은 “인권위는 소통이나 의사표현을 너무 협소하게, 음성적인 방식에만 한정해 바라본 것 같다”며 “이번 판결이 서울시의 탈시설 정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발달장애인법에도 명시돼 있듯 당사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사결정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 기본”이라며 “법인 측은 그 기준에 따라 조치했고, 그렇게 나온 의사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기본적인 탈시설 정책 방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시는 당사자가 스스로의 의사를 바탕으로 퇴소를 원할 경우 이를 지원해 온 기존 방침을 유지할 계획이다. 다만, 이번 판결에서 쟁점이 된 ‘의사 표현의 범위’에 대해서는 향후 판결 내용과 구체적인 사례를 검토하면서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번 사안은 인권위의 해석과 법원의 해석 간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며 “어디까지를 비언어적 의사표현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저희도 따라가야 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탈시설 정책은 서울시만의 독자적인 정책이 아닌 보건복지부의 상위 지침에 따라 추진되는 정책”이라며 “복지부 차원에서 이번 판결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게 되면 서울시도 이에 발맞춰 대응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이예솔 기자
ysolzz6@kukinews.com
이예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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