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도 ‘식품사막’ 찾는 바퀴 달린 마트

설에도 ‘식품사막’ 찾는 바퀴 달린 마트

14년 동안 1.5t 탑차로 매주 묘량면 마을 42곳 누벼
전국 행정리 가운데 2만7609곳(73.5%)에 소매점 없어

설 명절을 앞둔 24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에서 마을 주민들이 이동식 마트인 ‘동락점빵’ 트럭을 이용하고 있다.

"자식들이 해갖고 오는디 간단한 건 내가 해야제."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식들 먹일 생각에 들뜬 부모의 마음은 늙지도, 시들지도 않는다. 지난 24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장동마을 어귀에서 오인순(86)씨는 막걸리, 숙주, 콩나물, 계란, 두부를 샀다. 매주 집 앞까지 찾아오는 '동락점빵' 트럭 덕이다.

묘량면에서 시작한 '동락점빵사회적협동조합(동락점빵)'은 지난 14년간 1.5톤 탑차에 각종 식료품과 생필품을 싣고 마을 곳곳을 누벼왔다. 매주 이틀에 걸쳐 묘량면 내 42개 마을을 순회하며, 고령 주민들의 생활 속 어려움을 덜어주고 있다. 이용객 대부분은 지팡이나 유아차, 전동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는 이들이다.

오씨 또한 며칠 전 운동을 하다가 무릎을 다쳐 거동이 불편해졌다. 읍내로 나가 물건을 살 수 없던 차에 점빵트럭은 단비 같은 존재였다. 이날 오 씨는 고춧대(고추의 줄기를 고정하는 말뚝)를 짚고 천천히 트럭 앞으로 다가섰다.

운당리 주민들이 묘량면 운암경로당 앞에 정차한 동락점빵 트럭을 이용하며 김 복지사와 대화하고 있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묘량면 장동마을 앞에 정차한 동락점빵 트럭으로 다가가고 있다.
동락점빵 트럭이 묘량면 덕흥리 한 주민의 집 앞에 정차해 있다.
동락점빵 트럭이 묘량면 덕흥리 한 논 앞에 정차해 있다.

묘량면은 식료품을 파는 소매점이 사라진 이른바 ‘식품사막’ 지역이다. 2010년 유일한 구멍가게가 ‘돈이 안 된다’며 문을 닫았다. 주민들은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해 읍내까지 15분 거리를 운전하거나, 하루 5번만 오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이런 불편함을 지켜본 여민동락공동체는 대안을 모색했다. 묘량면에 ‘동락점빵’이라는 점포를 열고, 같은 해 1.5톤 탑차를 구입해 ‘이동식 동락점빵’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현재 동락점빵은 주민으로 구성된 4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며 마을의 중요한 일원으로 자리 잡았다. 

통계청의 2020년 농림어업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3만7563개 행정리 중 소매점이 없는 곳은 2만7609곳(73.5%)에 달한다. 이는 단순히 ‘식품 접근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과 직결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동락점빵은 쇠퇴하는 지역 주민들의 건강권과 기본권을 보장하는 대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김동광 사회복지사가 동락점빵 점포에서 트럭에 실을 물품을 정리하며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최효심(50)씨가 묘량면 장동마을에서 주민이 주문한 물품을 배달하고 있다.
신병하(90)씨가 묘량면 삼효리 석산경로당에서 버섯, 고추, 두부, 콩나물, 숙주 등을 구입하고 있다.

명절을 앞두고 동락점빵은 평소보다 3배가량 높은 매출을 올렸다. 영광군이 군민 1인당 50만원의 민생경제회복지원금을 지급한 덕분이다.

동락점빵은 단순히 이문을 남기기 위한 사업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작업이다. 4년 전 묘량면에 들어와 동락점빵 트럭을 운행하고 있는 김동광(37) 사회복지사는 "평소에는 콩나물만 사시던 어르신들이 지원금을 받은 뒤로 '과자', '황도캔', '참치캔' 같은 물건도 사기 시작했다"라며 "명절을 맞아 살 것을 사고, 생활에 여유가 생긴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마을 어르신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며, 만날 때마다 반갑게 안부를 묻는다. 이름 대신 '은색 대문 집', '골목 끝 집', '비석 있는 집' 같은 마을의 특징이 기억을 돕는 열쇠다.

마을 어르신들도 그런 동락점빵 트럭을 기다린다. 삼효리에 사는 엽금옥(80)씨는 전날 읍내에서 장을 봤음에도 트럭에서 물건을 잔뜩 사들였다. 엽씨는 "트럭에서 안 파는 고기만 영광에서 사왔다"며 "설 쇠고 나면 장사가 잘 안 디야, 우리 마을에서 하는 겅게 이럴 때 돕는 거제"라고 말했다. 김 복지사는 읍내 마트가 더 저렴하다고 설득해도 어르신들이 듣지 않는다고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점빵 트럭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을 넘어, 마을 주민들 간의 유대를 깊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광=유희태 기자

유희태 기자
joyking@kukinews.com
유희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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