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아산시 보도자료에서 참으로 참신한 내용을 접했다. 11월 2, 3일 열리는 ‘이순신 순국제전’을 주관하는 시 주무관의 기고문이다. 행사의 의미를 알리며 참여를 권유하는 글이다. 3000자 남짓의 제법 긴 글로 제목은 ‘영웅을 지키는 영웅들의 축제’.
순국제전은 경남 남해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유해를 고향 아산에 모시는 장례행렬을 재현한다. 그리 길지 않은 재임기간, 행사를 양산(量産)한 박경귀 전 시장이 낙마한 상태에서 2회째 열린다. 내년 4월 재선거를 통해 새 시장이 취임하면 행사 지속을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주무 공무원으로서 적극적 홍보에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절실하다. 공직사회가 강조하는 ‘적극행정’으로 박수 받을만 하다.
주무관은 “우리 민족에게 장례는 마을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경건한 의식이자 잔치였다”면서 행사에 대한 일부 반대 목소리를 경계했다. 그는 충무공의 장례 역사 사실도 철저히 조사한 듯했다.
“이순신의 유해는 한 달 뒤에나 유족들에 의해 고향 아산 땅으로 올 수 있었다. 이순신이 죽고 15년이 지나서야 유족들이 조정에 간청하여 겨우 직위에 맞는 장례식을 치렀다.”
전남 고금도에서 아산으로의 먼 길 운구 모습도 묘사했다. “고향집으로 가는 이순신 운구마차가 지나가면 백성들은 마차를 부여잡고 울며불며 놓아주지 않았다. 저잣거리 남정네들은 술도 마시지 않았다. 백성들 저마다 돈을 모아 비석을 만들고 제를 올렸다.”
관련 논문 ‘이순신 장례기록과 장례과정 검토’를 순천향대 ‘이순신연구논총’ 30호(2018년)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순신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순국했다. 육지로 도망한 패잔병 소탕에 시간이 필요해, 유해는 남해에 이틀 머물렀다. 이후 당시 수군통제영이 있던 완도군 고금도로 11월 21일경 운구됐다. 여기서 10여 일 머문 후, 12월 초 충무공 집안 사람들에 의해 육로로 아산으로 향했다. 아산 빈소에는 12월 10일께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장남 이회(李薈)가 운구에 도움을 준 분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길 가던 중에 직접 곡하시며 제문과 제물을 보내시고 애도의 정성이 극진하셨습니다. 위문의 글을 또 엎드려 받자옵니다. 부의와 물품도 보내주시니, 슬픔과 감사함이 교차하며 사랑의 정을 느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 돌봐주심에 운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1598년 12월 13일 죄인 이회 올림.”
노량에서 함께 싸운 명나라 진린 도독이 상경 길에 아산을 들러 이회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진린은 제문에서 “노량싸움에서 통제공(이순신)이 선봉이 되어 … 함께 적들을 새 잡듯 풀 베듯 하였도다. 통제공이 화를 면한 줄로만 알았지 탄환에 맞아 생명을 잃으실 줄이야 … 오호! 통제공이여. 나라가 피폐해졌는데 누구와 함께 바로잡으며 군사들이 낭패를 봤는데 그 누가 일으키리오? …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리요”라며 슬퍼했다.
장례식은 아산 본가에서 1599년 2월 11일 치뤄졌고, 유해는 금성산(현 錦山)에 안장됐다. 이순신은 5년 여 흐른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됐다. 충무공 집안에서 “일등공신에 맞는 예장(禮葬)을 치르게 해달라”며 조정에 건의해 1614년 현재의 어라산 이장이 이뤄졌다. 나라에서 관곽, 석회 등 이장 물품과 조묘군(造墓軍, 묘 조성 인력)을 지원했다.
다소 장황하지만 유해 운구와 안장·이장 과정을 소개했다. 전국에 충무공 관련 축제 및 행사가 많지만, 아산의 순국제전이 독보적 역사성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작년과 달리 조선 사대부의 장례 행렬 모습을 재연한다. 많은 문화 행사도 준비했다. 이순신 영화 상영, 제례악, 진혼무, 대붓 퍼포먼스 그리고 약 700명의 시민 대합창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기고자는 아산 시민 모두가 상주가 돼, 하나 되는 행사를 강조했다. 끝으로 “춤추고 노래하고 걷고 먹고 박수치고 웃으며 한바탕 놀자”면서 “죽음조차 함께 나누어 남은 삶의 생동감을 찾은 조상들의 전통과 지혜를 이어가자”고 역설했다. /천안·아산 선임기자
순국제전은 경남 남해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유해를 고향 아산에 모시는 장례행렬을 재현한다. 그리 길지 않은 재임기간, 행사를 양산(量産)한 박경귀 전 시장이 낙마한 상태에서 2회째 열린다. 내년 4월 재선거를 통해 새 시장이 취임하면 행사 지속을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주무 공무원으로서 적극적 홍보에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절실하다. 공직사회가 강조하는 ‘적극행정’으로 박수 받을만 하다.
주무관은 “우리 민족에게 장례는 마을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경건한 의식이자 잔치였다”면서 행사에 대한 일부 반대 목소리를 경계했다. 그는 충무공의 장례 역사 사실도 철저히 조사한 듯했다.
“이순신의 유해는 한 달 뒤에나 유족들에 의해 고향 아산 땅으로 올 수 있었다. 이순신이 죽고 15년이 지나서야 유족들이 조정에 간청하여 겨우 직위에 맞는 장례식을 치렀다.”
전남 고금도에서 아산으로의 먼 길 운구 모습도 묘사했다. “고향집으로 가는 이순신 운구마차가 지나가면 백성들은 마차를 부여잡고 울며불며 놓아주지 않았다. 저잣거리 남정네들은 술도 마시지 않았다. 백성들 저마다 돈을 모아 비석을 만들고 제를 올렸다.”
관련 논문 ‘이순신 장례기록과 장례과정 검토’를 순천향대 ‘이순신연구논총’ 30호(2018년)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순신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순국했다. 육지로 도망한 패잔병 소탕에 시간이 필요해, 유해는 남해에 이틀 머물렀다. 이후 당시 수군통제영이 있던 완도군 고금도로 11월 21일경 운구됐다. 여기서 10여 일 머문 후, 12월 초 충무공 집안 사람들에 의해 육로로 아산으로 향했다. 아산 빈소에는 12월 10일께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장남 이회(李薈)가 운구에 도움을 준 분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길 가던 중에 직접 곡하시며 제문과 제물을 보내시고 애도의 정성이 극진하셨습니다. 위문의 글을 또 엎드려 받자옵니다. 부의와 물품도 보내주시니, 슬픔과 감사함이 교차하며 사랑의 정을 느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 돌봐주심에 운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1598년 12월 13일 죄인 이회 올림.”
노량에서 함께 싸운 명나라 진린 도독이 상경 길에 아산을 들러 이회의 손을 잡고 통곡했다. 진린은 제문에서 “노량싸움에서 통제공(이순신)이 선봉이 되어 … 함께 적들을 새 잡듯 풀 베듯 하였도다. 통제공이 화를 면한 줄로만 알았지 탄환에 맞아 생명을 잃으실 줄이야 … 오호! 통제공이여. 나라가 피폐해졌는데 누구와 함께 바로잡으며 군사들이 낭패를 봤는데 그 누가 일으키리오? …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리요”라며 슬퍼했다.
장례식은 아산 본가에서 1599년 2월 11일 치뤄졌고, 유해는 금성산(현 錦山)에 안장됐다. 이순신은 5년 여 흐른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됐다. 충무공 집안에서 “일등공신에 맞는 예장(禮葬)을 치르게 해달라”며 조정에 건의해 1614년 현재의 어라산 이장이 이뤄졌다. 나라에서 관곽, 석회 등 이장 물품과 조묘군(造墓軍, 묘 조성 인력)을 지원했다.
다소 장황하지만 유해 운구와 안장·이장 과정을 소개했다. 전국에 충무공 관련 축제 및 행사가 많지만, 아산의 순국제전이 독보적 역사성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작년과 달리 조선 사대부의 장례 행렬 모습을 재연한다. 많은 문화 행사도 준비했다. 이순신 영화 상영, 제례악, 진혼무, 대붓 퍼포먼스 그리고 약 700명의 시민 대합창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기고자는 아산 시민 모두가 상주가 돼, 하나 되는 행사를 강조했다. 끝으로 “춤추고 노래하고 걷고 먹고 박수치고 웃으며 한바탕 놀자”면서 “죽음조차 함께 나누어 남은 삶의 생동감을 찾은 조상들의 전통과 지혜를 이어가자”고 역설했다. /천안·아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