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여자가 술은 왜 마셔 [0.687]

그러게 여자가 술은 왜 마셔 [0.687]


[0.687]
글로벌 성 평등 지수 0.687. 156개국 중 102위. 한국은 완전한 평등에서 이만큼 멀어져 있다. 기울고 막힌 이곳에서도 여성은 쓴다. 자신만의 서사를.

그래픽=이해영 디자이너
한국 여성이 든 술잔은 무겁다. 알코올뿐만 아니라 술로 인해 겪는 폭력과 편견 뒤따르는 책임까지 녹아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시작이자 끝. 술 마시는 여성을 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게, 여자애가 술은 왜 마시고 다녀서’ 

혼자 술 마시는 여성이 겪는 일들


김지연(30·가명)씨는 혼술(혼자 마시는 술)을 즐긴다. 칵테일 잘 만드는 바텐더를 찾아 한두 잔 마시고 집에 가기. 바쁜 삶을 사는 김씨가 가진 유일한 취미다. 아니, 취미였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지난 2019년 말, 간호사인 김씨는 3교대 밤 근무를 마치고 단골 바를 찾았다. 잦은 야근에 하필 난동을 부린 환자를 만나 유난히 힘든 날이었다. 괜찮은 술을 두어 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첫 잔을 비우고 두 번째 잔을 입에 대려던 순간. 지연씨 옆으로 다가온 남성이 팔을 잡았다. 만취해 꼬부라진 혀로 그가 말을 했다. 한 잔 사줄까요. 혼술 하러 왔으니 비켜달라고 짧게 답하고 남성의 손을 떼어냈다. 문제는 그다음 순간 터졌다. 거절당한 남성이 등을 세게 가격한 것이다.

아픔보다 당혹스러움이 더 컸던 김씨. 폭력을 가한 남성은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혼자 있어서 좋은 의도로 술 한잔 사주겠다는데 말을 싸가지 없이” 김씨가 별안간 맞은 이유였다. 폭행당한 김씨와 가해자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다가와 말리던 남성의 지인도 한 마디 얹었다.

“그러게, 여성분이 늦은 밤에 뭐 하러 혼자 술 마시러 나와 있어요 사람 오해하게”

술 좀 하는 여성이 겪는 편견과 폭력

이현주(32·가명)씨는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퇴사를 결심한 계기는 최근 있었던 부서 회식이다. 애주가인 이씨는 회식 참여에 활발한 편이었다. 선배·동료들과 잘 지내기에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믿기도 했다. 회식 자리에서 그는 늘 분위기를 띄우고,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여느 날처럼 회식을 마치고 집에 가려던 길, 친한 이성 선배가 할 말이 있다며 한잔 더 하자는 요구를 해왔다. 따라나선 그에게 선배가 가자고 한 장소는 모텔이었다. 화내는 이씨에게 부적절한 관계를 요구한 직장 선배가 말했다.

“현주씨 이런 경험 많지 않아? 술 좋아하니까 한두 번 뭐 쿨하게”
 
불쾌한 경험 이후, 현주씨는 출근이 거북해졌다. 고민 끝에 다른 선배에게 상담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씨를 탓했다. 그러니까 자꾸 회식 가고, 술 마시고 그러지 말라고. 이씨는 자신을 보는 회사 직원들의 눈초리에 환멸을 느꼈다. 술자리를 즐기는 여성은 문란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러운 대우를 받을만하다고 보는 인식에 숨이 막혔다.

여성에게 걱정 없이 취할 권리 없나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여성은 음주에 강박에 가까운 걱정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대표적인 것이 취하도록 마시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다. 친한 동성 친구와의 술자리가 아니면 주량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술자리에서 이성에게 폭력적인 대우를 받고 주변에 털어놨다가 오히려 비난을 당한 경험도 흔했다. 사회의 편견은 여성이 음주와 관련해 문제에 빠졌을 때 위축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다. 

김한솔(28)씨는 “여성들이 술 마시다 생긴 문제를 이야길 하면, 많은 이가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는 쪽으로 결론을 낸다. 술을 적당히 마셔야 하는 건 남자 여자 모두 같다. 그러나 명백히 범죄 피해자임에도 문제의 책임은 늘 술 마신 여자에게 있다고 몰아간다”고 말했다.

술 마시는 여성이 폭력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원인은 여성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 있다는 지적도 있다. 만취한 여성과의 성관계를 시도하는 것, 술자리를 거부한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 모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김선희(28)씨는 “취했다 싶을 때를 기다려 부적절한 관계를 시도하는 경우를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것”이라며 “맨정신에 동의받지 못할 행동이라면 취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인격체로 본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지영의 기자 ysyu1015@kukinews.com
지영의 기자
ysyu1015@kukinews.com
지영의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쿠키뉴스 헤드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