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택시 번호판 찍어 보내야 하나요 [0.687]

언제까지 택시 번호판 찍어 보내야 하나요 [0.687]


[0.687]
글로벌 성 평등 지수 0.687. 156개국 중 102위. 2021년 한국은 완전한 평등에서 이만큼 멀어져 있다. 기울고 막힌 이곳에서도 여성은 쓴다. 자신만의 서사를.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벌써 새벽 1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줄 몰랐습니다. “늦었다. 얼른 들어와라” 친구 부모님 연락에 급하게 택시를 잡았습니다. 친구를 배웅하며 택시 번호판도 찍어 놓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당부도 남깁니다. 혼자 집에 가는 길, 으스스한 느낌에 발걸음을 재촉해봅니다. 골목보다는 큰 길로 돌아갑니다. 현관에 들어섰습니다. 일찍 일찍 다니라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귓가를 울립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늦게 다니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겁니다. 늦은 밤에는 서로 집에 도착했다는 확인 문자를 보냅니다. 여성들은 왜 귀갓길을 불안해 할까요. 20대 여성들과 이야기해봤습니다.

여러분의 귀갓길은 어떤가요. 불안을 느낄 때도 있나요.

지우(22·가명):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후 10시쯤 집으로 향해요. 술 취한 사람들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어요. 가끔 제 뒤를 따라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죠. 한 번은 가만히 서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고요. 친오빠에게 말했더니 아이쉐어링(위치 추적 앱)을 이용해보자고 했어요. 지금 제가 어디에 있는지 오빠 휴대전화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소영(23·가명): 수유역 근처에서 친언니와 자취를 하고 있어요. 집 가는 길에 골목길이 많습니다. 혼자 늦게 집에 갈 때는 한번 더 주위를 살피면서 걷습니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는데 지하철에 내려 거리를 걸을 때는 이어폰을 빼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달려가기도 해요. 제가 집에 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늘 언니가 받을 때까지 전화해요. 제가 받지 않으면 친구에게 전화를 할 때도 있어요.

윤서(25·가명): 미술을 전공하고 있어요. 학교에서 야간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새벽 2-3시에 끝나면 택시 타고 집에 갈 수 있어도 해 뜰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에요. 어두운 밤에 길을 걷는 것이 걱정되니까요. 고등학생 때도 미술학원에서 밤늦게 마치면 여자 학생들은 남자 형제나 부모님이 데리러 왔어요. 학원과 집이 멀어 택시를 타고 가는 저를 위해 친구 오빠가 기사님께 안전을 당부를 했어요. 택시 번호판도 늘 찍어 보내줬어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여성의 비율은 약 30%에 불과합니다. 왜 여성의 밤길은 유독 불안할까요.

지우(22): 각종 강력 범죄 사건을 보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스토킹 등 여성이나 약자 대상 강력범죄가 연일 보도되고 있잖아요. 비슷한 또래 피해자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 같아요. 특히 밤 시간대는 어둡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아 무서울 수밖에 없죠.

윤서(25): 어렸을 때부터 ‘여자 아이’이고, ‘딸’이니깐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어요. 일종의 암묵적인 학습이죠. 한 남성이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어 주의를 주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그러자 부모님이 해코지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그러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물론 걱정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죠. 그런데 그런 말을 듣거나 실제 위협이 느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나 자신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슷한 맥락에서 밤길도 불안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여성의 귀갓길 안전을 위한 정책이 나오고 있어요. 그럼에도 밤길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영(23): 누군가는 치안이 좋은 한국에서 왜 그렇게 안전을 걱정하냐고 말해요. 저의 불안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여성 대상 범죄 인식이 전보다 나아지고 있죠. 처벌도 강해졌고, 여성의 안전을 위한 정책도 고려되고 있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성범죄 등 강력 범죄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에요.

윤서(25):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범죄를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혼자서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거죠. 저는 뉴스에서 여성 대상 범죄 사건이 나오면 다른 채널로 돌려버릴 때도 있어요. 피해자는 계속 발생하는데 사건의 심각성만 다루고 끝나버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피해자를 보호하거나 예방할 진짜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거죠. 결국 스스로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여성도 안전한 밤길이 되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지우(22):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특히 성범죄 등 강력 범죄자의 형량이 약하다는 논란이 많아요. ‘범죄를 저지르면 이런 처벌을 받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형량이 높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토킹 살인 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어처구니 없는 형량을 선고받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강한 처벌이 늘어날수록 범죄율은 낮아지지 않을까요?

소영(23):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0월부터 시행된 스토킹처벌법은 경범죄로 여겨졌던 스토킹을 형사 처벌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여전히 신변 보호를 받지 못한 피해자가 발생했어요. 물론 강력 처벌이 범죄률을 줄일 수 있지만, 그 전에 여성의 두려움에 공감할 수 있어야 법 시행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윤서(25): 저는 여성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인식과 제도 개선 모두 필요해요. 두 가지를 모두 이루기 위해선 왜 불안하다고 느끼는지부터 어떤 개선이 필요할지 터놓고 얘기해야 하죠. ‘안전’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

정윤영 인턴기자 yuniejung@kukinews.com

정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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