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휴대폰도 주고 싶은데”…68년 만에 푸는 이산가족 선물보따리

[기획] “휴대폰도 주고 싶은데”…68년 만에 푸는 이산가족 선물보따리

어떤 옷이 어울릴지 알 수 없다. 짐작으로 옷 치수를 가늠하고 혹시 안 맞을까 여러 벌을 준비한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물건을 집었다가 놓는다. 

68년의 세월 동안 그리워하던 이의 모습, 취향이 어떻게 변했을지 갈피조차 잡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으로 향하는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들의 가방에는 선물이 가득하다. 함께 있었다면 생일·입학·결혼 등 때마다 챙겨줬을 물건들이다. 20일 남측 방문단 93명이 금강산에서 가족을 만난다. 그들의 선물에는 각각 어떤 사연과 그리움이 담겨있을까.

그리움은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다. 정학순(81)씨의 두 눈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이북 지역인 강원도 금화군에 살던 정씨가 14살이던 해, 6.25 전쟁이 터졌다. 동네 이장이 작은 오빠를 데려갔다. “잠깐 갈 곳이 있다.”고 했다. 고작 2살 터울이었는데도 어른스럽고 자상했던 작은 오빠. 그가 의용군에 끌려간 것을 알게 된 건 사흘 뒤였다. 전쟁이 격해지자 가족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어머니는 작은 오빠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보면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슬피 우셨다. “텅 빈 집에 돌아왔을 때 오빠 기분이 어땠을꼬.” 정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작은 오빠는 지난 2001년 사망했다. 대신 올케와 조카를 만난다. 정씨는 보따리 두 개를 준비했다. 안감이 두둑한 남녀 내복이 먼저 눈에 띈다. 사이즈는 어림짐작으로 준비했다. 속옷도 구입했다. 겨울 점퍼만은 좋은 것으로 해주고 싶은 마음, 큰맘 먹고 고가 제품을 샀다. 정씨가 조카에게 주고 싶은 선물은 사실 휴대폰이다. 헛된 희망인 줄 안다. 하지만 휴대폰이 있으면 가끔이라도 연락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작은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정씨는 무엇을 준비했을까. “우리 오빠는 내가 갖고 싶다는 거 사줬으면 사줬지 받는 사람이 아니야.” 정씨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돌았다.

형을 만난다. 꿈에서나 그리던 첫째 형이다. 68년 만의 상봉이다. 요새 통 잠을 못 잔다던 이수남(77)씨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 설렘이 가득했다. 헤어짐에 예고는 없었다. 이씨가 9살 그리고 큰 형이 19살이었던 1950년, 형은 인민군에 끌려갔다. 생이별이었다. 이씨의 어머니는 십여 년간 정화수를 떠 놓고 북으로 간 아들의 무탈을 빌었다. ‘남은 가족은 형 하나지만, 형은 모든 가족을 잃었다’는 생각이 매일 같이 이씨를 괴롭혔다. 그리움이 사무쳤다.

이씨는 큰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를 만난다. 고령인 형의 건강이 가장 걱정이다. 상비약과 건강 보조제를 먼저 생각했다. 속옷과 양말, 스타킹, 수건도 넉넉히 준비했다. 조카에게 어린 자식이 있을지 몰라 사탕도 넣었다. 아쉽게 챙기지 못한 선물이 있을까. 이씨는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좋은 고기를 싸가고 싶어. 우리 가족이 만나는 잔치에 고기가 빠지면 되나. 내가 정성껏 요리해 실컷 드시라며 차려드리고도 싶고. 참,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강정림 그리고 강산희.” 어떠한 질문에도 “모른다.”며 고개를 젓던 강화자(90·여)씨는 북녘에 있는 동생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강씨는 3년 전부터 가벼운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 고향인 황해도 연백의 풍경도, 어머니와 동생들의 마지막 모습도 흐릿해졌다. 헤어질 당시, 18살이었던 여동생과 10살이었던 남동생은 각각 지난 2007년과 2009년 세상을 떠났다. 강씨의 딸인 김연숙(64)씨는 매일 아침 강씨에게 두 동생의 자녀들을 곧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강씨는 조카와의 만남에 대해 “두 동생을 만나는 것처럼 기쁘다.”고 말했다. 

조카들에게 줄 선물은 거동이 불편한 강씨 대신 딸 김씨가 직접 골랐다. 치약과 우산, 양말 등 생활용품, 감기약·연고·파스 등의 의약품, 영양제, 화장품을 두 세트씩 마련했다. 초코파이와 에너지바 등의 간식도 챙겼다. 두 조카가 집까지 편하게 선물을 가져갈 수 있도록 가방도 마련했다. 기록적인 폭염을 고려해 휴대용 선풍기도 준비했다. 그러나 USB 충전식 선풍기를 북에서 쓸 수 있을까 고민이다. 만약 강씨가 직접 선물을 골랐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분단의 긴 세월은 강씨에게 많은 기회를 앗아갔다.

“잠시 원산으로 피했다가 오너라.” 평안남도 순천군이 고향인 백성연(85)씨. 백씨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마지막 말이다. 5남매 중 셋째 딸인 이씨는 17살이 되던 해 언니 부부와 피난길에 올랐다. 잠시는 영원이 됐다. 중공군에 떠밀려 세 사람은 강원도 원산에서 남쪽으로 걷고 또 걸었다. 남한에도 전쟁의 상흔은 깊었다. 언니 부부와 길이 엇갈리며 백씨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이 됐다. 

백씨는 남동생의 아내, 여동생의 남편과 딸을 만난다. “천운이라고 생각해요.”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동생의 가족들. 어떤 선물을 준비했을까. 백씨는 황금색 보자기를 조심스레 풀었다. 북쪽 겨울은 남쪽보다 추울 테다. 올케와 조카를 위해 분홍색 꽃무늬 내의를 골랐다. 체구도 모르는데 겉옷은 어쩐다. 각양각색의 옷감을 바리바리 떼 왔다. 아무래도 생활에 보탬이 되는 건 용돈이 아닐까. 달러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수십 번 고민 끝에 포기했다. 백씨 내외가 20년 전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찍은 사진도 챙겼다. 어떻게 살았는지, 생전 무탈했는지 끝내 동생에게 직접 묻지 못한 질문도 함께 가져간다. 백씨가 이번 상봉에서 가장 고대하는 건 무엇일까. 어릴 적 헤어진 동생 경연이, 내연이를 사진으로나마 재회하는 순간이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 알아볼 수 있겠어요?” 아들의 농담에 김광호(80)씨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동생을 만난다는 사실에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한국전쟁 도중 이른바 ‘흥남철수’ 작전을 통해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를 타고 거제도로 내려왔다. 이후 북에 남아있는 가족과 모든 연락이 두절됐다. 

매번 이산가족 추첨에서 떨어졌던 그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동생과 제수를 만난다. 68년 만에 고향의 가족과 재회하는 것이다. 김씨는 동생 부부와의 만남을 ‘기적’이라고 표현하며 부푼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상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마음에 선물도 한가득 준비했다. 큼지막한 가방에 겨울 외투, 내복, 양말 등을 꾹꾹 눌러 담았다. 동생과 제수의 옷 치수를 몰라 본인과 아내가 평소 입는 사이즈로 챙겼다. 북한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초코파이도 챙겼다. 그래도 모자라는지 영양제, 사진 등도 준비했다. 전자시계도 여러 개 구입했다. 북녘에 있을지도 모를 조카에게 주고 싶어서다. 

“해방된 후 보름쯤 되던 날이었지” 이시득(95)씨는 가족과 헤어지던 때를 회상했다. 당시 나이 19세, 일자리를 위해 고향 함경남도를 떠나 서울로 내려왔다. 돈을 벌면 가족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길이 가족과 영영 헤어지는 것일 줄은 몰랐다.

이씨는 조카 2명을 만난다. 달력에는 이산가족상봉 일정이 크게 적혀있다. 이씨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와 닮았으리라 여기고 매일 조카들의 얼굴을 상상한다.”며 상봉을 고대했다. 직접 시장에 나가 선물도 준비했다. 화장품, 부채, 셔츠, 내복 등 선물과 함께 애정과 그리움을 담았다. 두 개의 여행 가방이 가득 찼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지. 동생들이 나를 대신 했을 거야.” 그의 말에 미안함이 묻어났다. 이씨는 이제야 가족들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수 있게 됐다.

민수미, 정진용, 이소연, 김도현, 신민경 기자 min@kukinews.com/ 사진=박효상, 박태현 기자 tina@kukinews.com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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