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키 영화] 2010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던 해운대 해변을 걸어가는 내 눈에 띤 큰 포스터에선 민낯의 유다인이 왼쪽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 적힌 영화의 제목은 ‘혜화,동’. 쉼표가 채 눈에 들어오지 않은 탓에 “대학로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군?!”이라고 생각하며 이웃 동네 영화에 짐짓 반가움을 표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물론 내 주위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올 초 개봉한 영화 ‘혜화,동’은 많은 이들을 조용히 숨죽이며 흐느끼게 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봤던 이들도, 따로 봤지만 얘기를 나눴던 이도 모두 “가슴이 아팠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혜화 冬(겨울)
대기마저 건조한 겨울 거리를 눈에 띄는 빨간 목도리를 한 여인이 탄 한 대의 스쿠터가 달린다. 어느 재개발 동네에 도착해 짐칸에서 케이지를 꺼내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사람을 경계하던 버려진 개와 눈높이를 맞춰가며 결국 구출하는 그녀의 이름은 ‘혜화’다. 무사히 구출한 개를 담은 케이지를 무겁게 들고 가던 그녀에게 재개발지역에 버려진 또 한 마리의 개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의 발길이 없어 인적이 끊긴 빈집을 조심스레 들어가 개를 찾는 불안한 눈길의 ‘혜화’. 시린 바람만 가득한 텅 빈 재개발촌의 모습은 주인공 ‘혜화’의 마음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영화는 스물셋 ‘혜화’의 겨울이야기를 담고 있다.
혜화, 動(움직임)
일병 계급장에 예비군 마크를 달고 등장하는 한 남자. 절고 있는 다리를 보아 의병 제대한 것이 분명한 남자는 어느 집에 몰래 들어가 집주인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 그는 5년 전 혜화와 사랑하는 사이였던 ‘한수’다. 영화는 이때부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끊임없이 혜화의 주위를 맴도는 ‘한수’, 그리고 과거를 남나들며 얘기를 들려주는 영화는 도무지 정적일 것 같았던 예상을 깬 채 쉬지 않고 움직이며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더욱이 많은 부분을 핸드헬드로 촬영해 ‘혜화’와 ‘한수’의 심리를 보여준다. 영화는 ‘혜화’와 그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는 관객의 심정까지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영화다.
혜화, 童(아이)
‘혜화’는 유기견들을 마치 자식처럼 돌본다. 주인을 찾지 못한 개들을 모두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기른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개에게도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밥을 주듯 안심시키며 데려올 줄 안다. 5년 전 죽음으로 잃었던 아기에게 하지 못한 사랑을 대신 베풀 듯 그녀는 유기견을 돌본다. 또 동물병원장의 아들을 돌보는 모습은 엄마 그대로의 모습니다. 아이는 ‘혜화’의 가슴을 찾으며 모성을 느끼고, ‘혜화’는 아이에게 가슴을 허락하며 모성을 베푼다.
5년 전 ‘한수’의 부모님께 인정받고, 당당하게 아이를 낳고 살아보려는 ‘혜화’는 ‘한수’와 그 부모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리고 늙은 엄마의 도움을 받아 홀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죽었다는 알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나타난 ‘한수’는 아이가 살아있다고 전한다. 5년 동안 손톱을 깎아 모으며 시간을 쌓아온 ‘혜화’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토끼 머리핀을 한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유치원에 잠입한다. 영화는 ‘혜화’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혜화, 痛(아픔)
5년 전 ‘한수’와 그의 부모에게 외면당하고 홀로 산고 속에 아이를 낳고, 아이를 죽음을 겪은 ‘혜화’는 현재 기대고 의지하던 동물병원장의 재혼 선언과 느닷없는 ‘한수’의 등장에 고통스러워한다. 게다가 늙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넋두리하듯 그녀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참는다.
게다가 ‘혜화’가 키우던 개 ‘혜수’의 새끼로 짐작되는 하얀 개는 탈장과 개장수의 위협으로 고통 받는다. ‘혜화’는 이 개를 도우려 하지만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영화가 진실에 다가갈수록 ‘혜화’도 관객들도 모두 아파한다. 영화는 ‘혜화’와 우리 모두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다.
또 다시 혜화, 同(하나 됨)
‘한수’의 끈질긴 설득 때문일까? 조금씩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혜화’. 그리고 107분 동안 영화 속에 동화돼 가는 관객들. 이들 모두가 하나가 되고 있다. 지난 3월 21일 홍대의 한 호프집에서 영화 ‘혜화,동’의 1만 관객 돌파 기념 파티가 열렸다. 손익분기점인 3만 명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숫자지만 독립영화로 2011년에 처음으로 1만 명 이상의 관객이 이 영화를 찾았던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트위터를 통해 ‘찾아가는 대화’를 이끄는 민용근 감독은 관객들을 직접 만난다. 짧게는 몇 십 분에서 몇 시간까지 관객이 원하면 어디든 찾아가 관객들과 얘기를 나누며 하나가 된다. 1만 파티가 있던 날도 영화 상영이 있었고, 민용근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파티에 참석했다.
지금까지 약 1만2500여 명의 관객이 스크린을 통해 ‘혜화,동’을 만났다. 보기에 따라 적을 수도, 많을 수도 있는 숫자지만,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의 수다. 또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앞으로 이 영화를 볼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얘기가 아닐까?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이 영화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영화일 것이다.
민용근 그는
‘혜화,동’을 연출한 민용근 감독은 방송 다큐멘터리 PD출신으로 단편 ‘도둑소년’(2006)으로 삿포로국제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유림, 장훈감독과 옴니버스영화 ‘원 나잇 스탠드’(2010)을 연출해 평단과 업계로부터 주목받았다. 일상 속에 존재하는 일반인들의 특정한 행동 속에 감춰진 진실을 따라가는 작업을 했던 그가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일상들을 들려준다.
앞으로 ‘더 힘 있고 액티브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감독의 바람을 담아 더 섬세하고, 그만의 이야길 들려주는 반가운 영화를 빠른 시간 안에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물론 아직 그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겐 반드시 ‘혜화,동’을 만나보길 권하며.
정지욱(영화평론가, nadesiko@unitel.co.kr)
정지욱은 현재 일본 Re:WORKS 서울사무소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본심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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