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기자의 now & then [3회] 실향민이 두고 간 풍경,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

 - 시간 멈춘 듯, 옛 풍경 곳곳에 남아

라떼기자의 now & then [3회]  실향민이 두고 간 풍경,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

- 1세대 대부분 세상 떠나, 2,3세대가 마을 지켜
- 외지 상인들 들어서며 변형 아쉬워
- 주말이면 섬 전체 관광객으로 북적북적
- 강화성당과 조양방적도 레트로 촬영 포인트 

[쿠키뉴스] 강화· 글/사진 곽경근 대기자 = “평생을 이 조그만 가게에서 영감이랑 장사해서 아이들 다 공부시키고 출가시켰지, 이제는 좀 넓은 곳에서 두 다리 쭉 피고 사는 날까지 살고 싶어, 요 아래 길가에 내 땅이 120평 있는데 허가가 안 나네” “기자 양반이 어케 힘 좀 써줘”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에서 잡화가게를 운영하는 실향민 1세대 안순모(90) 할머니가 던진 첫 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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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1세대 안순모 할머니가 자신의 가게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내가 20살 때 황해도 연백에서 아버지랑 어린 두 동생 데리고 이 섬으로 피난 와서 산지 벌써 70년이나 됐네, 나머지 두 동생과 어머니는 고향에 남았는데. 그 후로 영영 이별이 된 거지. 아버지는 처자식과 재산을 두고 피란 나와서 몇 달만 있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갈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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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마을 상징 제비'  실향민들은 바다 건너 고향마을을 오가는 제비들에게 특별한 정서적 공감대를 갖고 있다. 그래서 고향 소식도 전해줄 것이라는 희망에 제비들의 보금자리를 잘 지켜왔다. 대룡마을은 시장 초입 주차장 옆에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소 ‘교동제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며 창문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는 자식 자랑에 다시 신이 나신 듯 말을 이어간다. “내 나이 22살에 황해도에서 피난 내려온 우리 영감 만나 결혼했지. 애들 아버지가 워낙 머리가 좋아서 장사를 아주 잘했어. 이 골목에서 화장품 장사했는데 그 때는 이 좁은 시장 통에 사람도 많고 장사가 잘 됐어.
아들 둘에 딸 하나 뒀는데 모두 서울 가서 좋은 대학 나와서 큰 아들은 대기업 상무이사, 둘째 딸은 미국서 잘 살고, 막내아들은 치과의사야, 그때 여기 대룡시장에서 자식들 모두 서울에 대학 보낸 집은 우리 밖에 없었어. 손주들이 6명인데 모두 대기업 다니고 치과의사 아들 역시 미국에서 치과 공부하는데 거기서도 1등 이래” 할머니는 자식자랑에 힘이 솟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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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시장 전경'  골목의 중심부는 외지 상인들이 주로 차지하면서 옛 상점의 형태가 조금씩 변형되었다.

 “필승! 차량번호와 성함, 핸드폰 번호 기입해주세요.”
강화 읍을 지나 곡식이 누렇게 익은 황금들판을 가로지르는 강화대로를 달려 교동대교 앞 얼마 전, 해병대원이 길을 막아서며 건넨 출입증명서에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 듯 병사가 전해 준 낡은 출입 비표를 차량 대시보드 위에 올려놓고 민간통제선(민통선)을 넘어 섬 속의 섬으로 시간 여행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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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보이는 '망향대'

2014년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다리가 놓이면서 사람의 왕래는 잦아졌지만 여전히 북한과의 최단 거리가 2~3km에 불과한 지역의 방문은 긴장 속에서 시작된다. 아직도 야간에는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는 지역이어서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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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는 일반 섬과는 달리 넓은 면적의 간척지가 있어 논 농사를 많이 짓는다. 매년 가을이면 기러기와 오리를 비롯해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와 겨울을 보낸다.

키 큰 오동나무(喬桐)라는 뜻의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자리 잡은 섬으로 면적으로는 대한민국에서 18번째로 꼽힐 만큼 큰 섬이다. 강화도와 황해남도 연백군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예전 개성상인들은 물론 멀리는 중국을 오가는 상인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섬 사이의 물살이 거세 조선시대 때는 탈출이 어려워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연산군은 이 섬에 유배되어 생의 마지막을 보내기도 했다. 일찍이 고려, 조선시대부터 주변 섬을 이어서 간척지를 만들고 농사를 지어 부농들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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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서 오시겨’ 교동도 시간 여행 일 번지 대룡시장
6.25 이후, 북한 지역과 최단거리 2.4km 안팎의 이곳은 남북 분단으로 왕래가 끊기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연백 출신의 실향민들이 고향의 연백시장처럼 대룡시장을 만들어 현재의 골목시장으로 발전시켰다. 대룡시장은 이후 70여 년간 교동도 경제 발전의 중심축을 이뤄왔다. 6~70년대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길 안팎의 낡고 허름한 1,2층 건물들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건축자재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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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 돌아보는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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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시장의 밤 품경. 여느 전통시장과 달리 이곳은 낮과 밤의 풍경이 확연하다. 밤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 일찌감치 상점은 철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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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농어촌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면서 2만 명 가까웠던 인구가 만 명 아래로 크게 줄면서 시장도 침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강화도 본섬과 교동도를 잇는 다리가 개통되고 몇몇 예능프로와 드라마에서 대룡시장이 소개되면서 재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코로나19’ 시절인 요즘도 주말이면 대룡시장은 옛 향수를 찾아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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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들어서면 잠시 1970~80년대로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착각에 빠진다. 이발관, 약방, 신발가게 등 많은 상점들의 내부는 문이 닫혀있거나 타 종목으로 바뀌었지만 외형은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실향민 1세대로 약방을 지켰던 나의환 옹도 최근 돌아가시면서 시장 내 1세대는 몇 분 남아계시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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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기자의 now & then [3회]  실향민이 두고 간 풍경,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
‘어서 오시겨’ 간판이 정겨운 좁은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 듯 착각에 빠진다. ‘교동이발관’과 ‘동산약방’, ‘중앙신발’, ‘교동은혜농장’, ‘중앙시계포’, ‘연안정육식당’, ‘대성양복점’, ‘궁전다방’, ‘교동극장’ '교동스튜디오' 등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낡은 간판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간판만 남아 있을 뿐 내부는 식당이나 카페, 분식점 등으로 바뀌어 운영 중이거나 빈 채로 먼지만 켜켜이 쌓여있다. 골목 담벼락 곳곳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벽화들과 아기자기한 조형물도 중간 중간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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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 장인 전경수 할아버지는 맞춤 양복을 하는 이가 없어 교동 옷 수선과 세탁 일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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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내에서 양복점과 세탁소를 운영 중인 전경수(81) 할아버지는 “우리 아내가 실향민 1세대야. 이름이 이순덕(77)인데 부모님하고 전쟁 통인 6~7살 때 해주에서 피난 나왔지. 난 교동사람인데 여기서 농사짓고 살다가 집사람 만나 결혼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양복 기술을 배웠어. 남의 양복점에서 10년 넘게 일하다가 영등포 대림중앙시장 앞에서 양복점을 차려서 사업 잘했어. 그런데 고향에 식구들이 다 있고 집 사람도 두 집 살림하기 어려워서 모두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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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가 50살 다 될 무렵이었는데 교동이 생각보다 부자 섬이어서 이 시장 통에만 양복점이 무려 6개나 있었어. 나도 사람 여럿 두고 운영했는데 먹고 살만했지. 그 당시는 결혼하면 양가 모두 양복을 지어서 입었고, 학생들 교복도 직접 맞춰서 입는 아이들이 많았지, 지금이야 뭐 기성복 나오면서 부터도 장사가 잘 안되었지만 누가 양복을 많이 입어야지, 일 년에 잘 해야 1~2 벌 정도 양복을 지어, 그래서 지금은 세탁일과 수선 일을 겸해서 하고 있는데 그냥 용돈 정도 벌어서 써”라며 아직도 안경 너머 정확하게 바느질하는 모습에서 장인의 솜씨가 엿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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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대룡골목 전경'  대룡골목은 한때 예능 프로그램의 배경이 되고 ‘옛 풍경을 간직한 명소’로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다.

안순모 할머니가 운영하는 잡화점과 전경수 할아버지의 대성양복점 등 옛 점포들도 일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자연히 상인들도 모이는 법, 대룡시장도 어느 새 외지에서 온 상인들이 시장 골목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옛 모습이 많이 변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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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의 한 마을 입구 경로당 앞에서 노인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1세대 실향민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자 가게 문을 닫고 영업이 중단된 곳이 많다. 이런 장소에 외지 상인들이 가게를 깔끔하게 수리하고 문을 열면서 시장 활성화에 크게 도움이 되긴 하지만 옛 향수를 찾아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주기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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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2세대가 운영하는 떡집. 며느리 이연옥(60) 씨가 관광객에게 교동 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간척이 이뤄졌으나 6.25 전쟁 이후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들과 전역한 상이군인들이 힘을 합해 교동도 인근의 3개 섬을 연결하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했다. 교동도의 쌀은 우수한 품질로 전국에서 인정받고 있다. 마을 주민은 해가 바뀌면 교동의 햅쌀은 구하기 어렵다고 귀뜸한다.

실향민 3세대인 최성호 대룡시장 상인회 회장은 “2010년 후반부터 유입이 늘어 현재 전체 상인의 20% 가량 외지인이 차지하고 있다. 비중은 적지만 이들이 대룡시장 매출의 절반 가까이 가져가고 있다. 전문적인 장삿술이 부족한 기존 상인들의 상실감도 크지만 그래도 큰 문제없이 소통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면서 “6~70년의 긴 역사를 간직한 대룡시장의 모습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고 보존 및 복원 방법에 대해 뜻있는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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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읍성(경기도 기념물 72호)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축조한 것으로 둘레 430m, 높이는 약 6m로 동남북 세 곳에 성문을 설치했다.현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남문) 부분만 남아 과거의 규모를 어림 짐작해 볼 뿐이다.

대룡시장을 중심으로  인근 연산군 유배지, 교동읍성, 난정리해바라기공원, 훈맹정음 생가터, 옛 우시장터 등까지 시장을 연계하고 망향대와 북진나루, 대룡마을의 상징인 제비까지 실향민들의 이야기를 엮어 볼거리와 이야기가 있는 대룡마을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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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묻다' 교동면사무소 아래에 위치한 순례자를 위한 동화 속 풍경 같은 작은 교회 전경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을 손꼽아 기다리던 실향민들이 연백의 장터를 그리며 하나 둘 만든 공간. 이제 1세대가 떠난 자리는 화석이 되고 그들이 억척스럽게 일군 시간의 흔적을 2~3세대 후손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며 지켜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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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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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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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강화 읍에 한옥형태로 지어진 성공회강화읍성당도 방문해보자.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 드린 후 문창살과 기와 등 우리의 전통 패턴을 적절한 광선을 이용해 흑백사진작품을 만들어보자. 지금은 근대역사박물관 및 대형 커피숍으로 변신한 조양방적도 레트로와 뉴트로 감성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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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 소재 '조양방적 내부' 이 곳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넓은 면적과 일반 생활사 박물관보다 다양한 전시 품목에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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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3세대 ‘연안정육점’ 최성호 사장 이야기

- ‘맛있고 품질 좋은 고기집’ 4대까지 이어가
- '백년가게' 정육 4대 명성, 떳떳하고 자랑스러워
- 시장 활성화와 함께 옛 거리 지키기 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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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정육점 3대사장 최성호 씨와 4대 아들 최순정 씨.  최성호 사장은 대룡시장 상인회 회장 직도 맏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인근에 도축장이 있어서 바로 소와 돼지를 잡았어요. 면사무소 산업계 직원이 도축증명서를 확인하고 돼지 엉덩이에 ‘경기 몇 번’이라고 도장을 찍어주면 그 돼지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바로 돼지 털을 벗기기 좋은 온도의 대형 가마솥으로 직행하는 거죠”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품질 좋은 돼지를 골라 도축하고 살과 뼈를 분리하는 발골(拔骨) 모습을 곁에서 보면서 자랐어요. 저도 이미 15세부터 칼을 잡았으니 경력이 40년이 넘었네요”
새벽 3시 집에서 출발해 경기도 천안의 한 도축장에서 통돼지를 구입해 한참 발골 중인 ‘연안정육점’ 최성호(58) 사장을 만났다. 현재 정육점은 자신이 운영하고 바로 옆 정육식당은 큰아들 최순정(30)씨가 맡고 있다. 4대 순정 씨는 틈틈이 아버지에게 돼지 분리 작업 기술도 익히고 대학생인 둘째아들 최순문(26) 씨도 시간 나는 대로 정육점과 식당에서 아버지와 형의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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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골작업하는 최성호 사장' 아버지의 가르침 그대로 노포(오래된 가게) 이어가고 있는 최성호 사장. 아버지에게 배웠던 그대로 아들들에게 일을 전수하고 있다.

“원래 할아버지(1대 최수재)께서 우리 섬 바로 건너 황해도 연안 읍에서 정육식당을 크게 하셨어요. 북한에서 잘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재산을 뺏고 죽인다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2대 최덕권)와 식구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오셨대요. 휴전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해 교동에 정착했고, 정육 일을 다시 시작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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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 3대’라는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는 최성호 사장은 연안정육점이 대대손손 이어지길 희망한다. 그래서 최 사장은 아들들에게도 자부심과 장인정신을 강조한다.

“사실 아버지는 이 일이 너무 힘들어 자식은 평범하게 살길 바랐지만 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곧 내 일이라고 늘 생각했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서울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지금의 정육점을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17세의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점포를 이어받은 아버지는 가게를 운영할 수 없는 미성년이었다.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하는 간절함으로 아버지는 면사무소로 달려갔다. 뜻밖에 면장은 어린 나이에 동생들을 책임지며 열심히 사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 장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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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 사장의 부친인 최덕권(선글라스 쓴 이) 2대 사장이 젊은 시절 친구들과 교동도 화개산에서 촬영한 사진=최성호 사장 제공

그 후 성인이 된 최 사장은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을 내면서 연안정육점이 탄생했다. 아버지는 결혼과 함께 가정도 꾸렸다. 2대 최 사장은 소 장사를 하고 정육점은 어머니가 맡아 영업을 이어갔다. 품질 좋은 고기를 적절한 가격에 판매해 연안정육점은 타 지역에서 섬으로 고기를 사러 올 정도로 번창했다. 그 덕에 3대 최 사장은 인천에서 공부하던 시절 오히려 도시 친구들을 분식점에 데려가 마음껏 사 줄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최성호 사장은 그 당시 따뜻한 마음으로 아버지 형편을 이해하고 도와준 지인의 자손들과 인연을 이어가며 지금도 명절이면 그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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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골목 담벼락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인구 유출이 심해지면서 한때 매출이 급감하기도 했지만 교동대교가 개통되고 대룡시장이 입소문이 나면서 현재는 식사뿐 아니라 정육 매출도 늘고 있다. 최 사장은 “늘 신선하고 질 좋은 고기를 적정한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 운영의 철칙”이라며 “선친에게 배운 것처럼 정직과 신뢰, 늘 손님의 입장에서 장사를 해야 한다”고 마음에 새기고 아들들에게도 강조한다.

라떼기자의 now & then [3회]  실향민이 두고 간 풍경,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
 취재에 사용 중인 1958년생 독일제 ‘35mm 자이스 이콘 콘타플렉스(ZIESS IKON Contaflex · 좌측카메라) 필름 카메라’다. 다른 한 대 역시 같은 회사 제품이지만 무려 20년이나 앞서 생산된 ‘120mm 이코플렉스 이안 렌즈 카메라’

‘기자와 같은 나이 라떼 카메라 메고 길 떠나’
흑백 풍경 속에는 그리움과 향수가 가득 배어 있다. 쿠키뉴스는 오래 전 시간이 멈춘 듯한 정겨운 고향 마을과 도시 개발로 얼마 남지 않은 골목풍경, 근대문화유산, 전통의 맥을 잇는 사람들을 찾아 ‘레트로 감성 여행’ 중이다.
kkkwak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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