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는 영국 회화사에서 손꼽히는 다작의 풍경화가이자 독창적인 표현기법으로 찬사를 받은 예술가이다. 이 작품은 1820년대 중반, 터너가 유럽을 여행하며 제작한 대형 항구 시리즈 중 하나로, 그중 두 번째로 독일 쾰른을 묘사한 그림이다. 세 번째 작품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프랑스 브레스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현재는 테이트 런던에 소장 중이다.
터너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전에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의 어항 디에프(Dieppe)를 두 차례 방문했다. 당시 현장에서 직접 그린 스케치뿐만 아니라, 기억 속 이미지와 상상력을 결합해 작품을 구상했다. 그는 그림에 근대적 요소인 증기선 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 작품은 햇살이 내리쬐는 장면과 수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며 도시의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부제인 프랑스어 <주소 변경 Changement de Domicile>은 오른편에 묘사된 배에서 짐을 나르는 부부를 지칭할 수도 있으며, 새로운 삶의 출발이나 이동을 상징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터너는 클로드 로랭의 항구 풍경에서 영향을 받아, 해변을 따라 펼쳐지는 건물과 선박들이 햇빛을 중심으로 배열되는 구성 방식을 따랐다. 이러한 구도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그림의 깊은 공간으로 이끌며 장대한 서사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당대 언론인들은 이 작품의 황금빛 색조가 너무 따뜻하여 남유럽에 더 어울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터너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디에프 항구>를 선보인 지 1년 후, <쾰른, 소포선의 도착> 을 전시했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한 폭의 시처럼 시간을 붙잡은 풍경이다. 이 그림에서 터너는 쾰른의 역사적 맥락과 고요한 분위기를 섬세하고도 낭만적으로 담아냈다. 신성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 식민지이자 자유 제국 도시였던 쾰른의 일부만 보여주면서도, 그로스 생 마르탱 교회 탑과 중세 성벽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시킨다. 작업하는 여성들과 버려진 폐선, 그리고 석양이 물든 하늘은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을 잠시 멈춘 듯한 서정을 자아낸다.
하지만 관광객을 실은 나룻배의 등장으로 과거와 현재가 조용히 부딪히는 순간이 탄생한다. 신성 로마제국 시절부터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였던 쾰른은 터너의 손에 의해 회화적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당시에도 중세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었기에, 터너는 이를 회상과 감상의 대상으로 승화시켰다.
“놀라운 기술과 가벼움과 화려함에 눈을 감을 수 없다”는 평은 단순한 찬사가 아니라, 터너의 빛과 공기, 시간의 감각을 포착해내는 능력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표현한 것이다.
터너의 그림은 단순히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억과 시간, 감정이 층층이 쌓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쾰른은 증기선과 철도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상품이 오가는 주요한 항구 중 하나였다. 쾰른은 라인강을 따라 해상 운송에 있어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터너는 해운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이 두 장소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매일 이 그림 같은 장소들을 변화시키는 찬란한 빛을 포착하고자 했다. 디에프의 경우 이른 아침이고, 쾰른의 경우 저녁이다.
그는 디에프에서 태양을 두 번이나 그렸는데, 하늘에는 하얀 불덩이로, 그 아래의 물 속에서는 약간 흐릿한 모습으로 그렸다. 쾰른에서는 태양이 무대에서 물러났지만, 광활한 하늘을 가로질러 무한히 사라지는 여운을 전달한다.
구름 표현에 있어 존 콘스터블(John Constable)과 동시대의 풍경화가인 월리암 터너의 작품과의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준다. 뉴욕 프릭 컬렉션에서는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해 보라’며 같은 갤러리에 전시하고 있다. 터너의 〈쾰른, 소포선의 도착〉 속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높은 고도에서 길게 펼쳐지는 권운(Cirrus cloud)을 연상케 한다. 일몰의 빛은 차가운 회색과 푸른빛을 머금은 구름을 스치며, 따스한 빛이 해안 도시를 물들이는 인상적인 색채 대비를 자아낸다. 터너는 항구의 활기, 움직임, 그리고 소리로 가득한 공공의 공간을 표현하면서도, 그 풍경을 빛과 대기의 유동적인 조화로 시각화했다.
반면, 존 콘스터블은 영국 시골 풍경의 정적과 내면의 평화를 충실히 재현한다. 그의 그림은 단지 자연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자라난 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시적 러브레터로 읽힌다. 외향적이고 역동적이며 역마살이 있는 터너와, 고요하고 사적인 콘스터블의 시선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

헨리 클레이 프릭이 소장한 바르비종 파의 대부인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1796~1875)의 네 점의 작품 중 가장 크다. 이 그림은, 코로가 프랑스 미술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풍경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그는 수많은 후배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작품은 그의 예술적 성숙기에서 정제된 감성과 표현력을 집약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호수>는 사실적인 자연 묘사보다는 서정적이고 인상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며, 초기의 구체적인 스타일과는 차별화된 감성 중심의 접근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코로는 자신의 작품을 ‘기념품(souvenir)’이라 불렀는데, 이는 실제 풍경을 충실히 재현하기보다는, 기억과 감흥을 바탕으로 한 내면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다는 의미였다.
한편, 같은 전시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존 콘스터블의 작품은 영국 시골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충성심을 반영한다.

존 콘스터블은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백마The White Horse〉를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존 피셔(John Fisher)에게 헌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의 삶에는 유독 특별한 의미를 지닌 한두 점의 작품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그림이 바로 나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1819년, 이 작품이 완성되던 시기, 콘스터블은 개인적·사회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수많은 퇴역 군인들이 영국 농촌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은 채 생계 기반을 잃고 있었다.
61년 생인 우리는 전후 8년 뒤에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전쟁의 상흔을 입은 군인들이 잃어버린 팔 대신 두 갈래로 된 쇠갈고리를 한 채 집집마다 다니며 강압적으로 구걸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또 커다란 망태바구니를 메고 폐지를 수집하러 다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망태할아버지가 온다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 하던 시절이었다. 전후의 사정은 어디나 비슷했다. 군인 실업률은 급등했고, 대륙봉쇄령에서 벗어나 유럽과의 무역 재개로 농산물 가격은 폭락하여 지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콘스터블의 가족 또한 몇 년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는 고향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빈곤과 범죄, 절망적인 사정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더 나은 삶을 찾아 해외로 떠나던 이민자들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백마>는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에 대한 감정적 회고이자, 상실과 회복의 기억을 담은 정서적 풍경화로 읽는다.
이 작품은 이전에 현장에서 그려둔 스케치를 바탕으로 런던의 작업실에서 완성되었으며, 화면 왼쪽 하단에는 ‘John Constable, ARA, London’이라는 서명이 남아 있다. 이는 작가가 실제로 이 풍경을 그린 시점과 장소가 그림 속 장면과 일치하지 않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흔적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아련한 회상의 장면이다. 콘스터블은 마치 오른편 강둑에 서서 직접 바라본 듯, 풍경의 세부를 정밀하게 담아냈다. 그는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중한 기억은 우리에게 현재를 견디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