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그룹과 DL그룹이 부도 위기에 놓였던 여천NCC에 자금을 수혈하기로 결정하면서 당장의 위기는 넘겼다. 그러나 여전히 적자가 지속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결국 정부 주도 사업재편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26년간 끈끈한 협력 관계를 이어온 양사 간에도 불협화음이 감지된다.
12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DL케미칼은 전날 긴급 이사회를 열고 2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안건을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DL그룹 지주회사인 ㈜DL이 DL케미칼 주식 82만3086주를 약 1778억원에 추가 취득하는 방식이다.
DL케미칼이 확보한 자금은 한화그룹이 지난달 말 이사회를 통해 대여를 승인한 자금과 합산해 여수국가산업단지 소재 여천NCC의 부도를 막는 데 수혈된다. 총 자금 규모는 약 2000~3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여수산단 핵심 시설인 여천NCC는 지난 1999년 4월 한화그룹과 DL그룹이 공동 설립한 석유화학 합작법인으로, 한화솔루션(옛 한화석유화학)과 DL케미칼(옛 대림산업)이 지분 50%씩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에틸렌 생산능력 3위 기업이지만, 2020년대 들어 중국발 공급과잉 여파로 실적이 급격히 악화했다. 2022년 3477억원, 2023년 2402억원, 지난해 236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고, 최근에는 여수 3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당장 오는 21일까지 360억원의 운영 자금이 필요한 데다, 이달 말까지 카드 대금과 회사채 상환 등 필요한 자금이 총 1800억원에 달한다. 연말까지는 3000억원이 필요할 전망이다. 자금 공급이 끊기면 여천NCC의 부도는 물론, 1·2차 협력업체와 지역사회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석화업계 불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지난 2019년 2700만톤에서 지난해 5700만톤(t)으로 급증했다. 오는 2028년까지 2200만톤가량의 추가 증설도 예정돼 있어, 범용설비를 보유한 여수·대산·울산 등 국내 주요 석화단지 전체가 적자를 지속하고 있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지난 3월에도 각각 1000억원씩, 총 2000억원을 출자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결국 정부의 개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12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하고 당초 올 상반기 내 후속 조치를 내놓을 계획이었으나, 탄핵 정국 및 조기 대선과 맞물려 기약 없이 연기됐다. 특히 업계에서 후속 조치를 통해 정부 주도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어 새 정부의 고민이 더욱 가중되는 모습이다.
한화와 DL 간 갈등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양사는 에틸렌 등 생산 원료 대부분을 여천NCC로부터 공급받고 있는데, 1999년 체결된 원료공급계약이 지난해 12월 종료된 바 있다.
지난해 말 계약만료 후 양사가 원료공급협상 소급을 전제로 임시가격으로 원료를 구매하는 상황에서, DL 측은 “기존과 똑같은 조건·절차대로 원료를 구매하는 자사와 달리 한화 측이 더 낮은 가격으로 공급받아 왔다”며 경영 악화의 책임이 일부 한화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한화 측은 “현재 당사가 공급받고 있는 에틸렌 가격은 DL과 동일한 수준이고, 올해 상반기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가격 수준”이라며 “DL이 팩트를 왜곡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DL이 올해 초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여천NCC로부터 공급받는 제품에 대한 ‘저가공급’으로 법인세 등 추징액 1006억원을 부과받았다”며 “전체 1006억원 중 DL과의 거래로 발생한 추징액이 96%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DL 측은 “이미 유사 추징이 과거에 있었지만 당시에도 최종적으로 추징이 취소됐었다”며 “이번 (추징) 건에 대해서도 불복 절차를 진행 중이고,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확정된 사안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