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파과’ 속 조각이 지닌 힘이 “수수께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같이 말한 배우 이혜영을 마주한 이는 더욱 “수수께끼” 같은 그의 힘에 압도될 것이다. 28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혜영은 “조각을 늙은 여자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녀가 놀랍게도 지닌 힘에만 집중했다”며 밝히며, 본인 역시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영화 ‘파과’(감독 민규동)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조직에서 40여 년 활동한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과 평생 그를 쫓은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김성철)의 강렬한 대결을 그린 액션 드라마다.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극 중 이혜영은 60대에 접어들고서야 다시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면서 본인의 쓸모를 고민하는 킬러 조각으로 분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 “별로 하고 싶지 않았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던 그였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조각은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는 이러한 평에 “막상 뚜껑을 여니까 초조하고 불안한데, 쏟아지는 모든 것이 칭찬일색이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가 조각 그 자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원작에도 없는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면서까지 캐릭터를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손톱이 되기 전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존재였다가, 손톱이 되면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서 류와 함께했잖아요. 그리고 류가 죽고 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살아 남았고요. 조각은 류의 환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 설명이 안 됐어요. 조각이 결국 ‘이 상실을 견뎌낼 만해’라는 여유와 초월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제게는 수수께끼였어요.”
그러나 정작 본인은 조각이 민규동 감독의 ‘제약’ 하에 조각된 인물이었다고 했다. 싱크로율부터 완벽한 재료였지만 “나는 그렇게 한 게 없다. 감독님이 상상한 대로 만든 것”이라고 얘기했다. “옷부터 걸음걸이까지 모든 것을 제약받았어요. 감독님이 ‘너무 귀여워요, 선배님 안 돼요’ 이러셨어요. 그 얘기를 왜 이제야 하냐고 분노하는 신에서는 ‘우시려고 하는 거냐, 그러면 안 된다’ 하면서 절제시켰어요. 일일이 코치받고 계산된 거였어요.”
이혜영은 자신의 연기 원천이 “(감독) 말 안 듣기”라고 진심 어린 농담을 던졌다. 그런 그에게 상세하고 명확한 디렉션이 주어지는 현장은 쉽지 않았을 법하다. “대충 무드만 머리에 갖고 다른 시나리오를 들고 현장에 나가죠. 그런데 민규동 감독님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에요. 정확하게 자르신 거죠. 잘 잘리면 더 좋지만, 잘 잘리지 않으면 전 다른 세계에서 혼자 (연기)하고 있는 거죠. 이번에는 어떻게 통제가 잘돼서 영화가 성공적으로 나온 것 같아요(웃음). 훨씬 좋았어요.”

진정 힘들었던 것은 63세의 나이로 소화해야 하는 액션이었다. “모든 게 다 힘들었어요. 이태원 촬영을 2박 3일 잡아놨는데, 첫날 싱크에 부딪혀서 갈비뼈가 나간 거예요. 안 끝내면 안 되는 거여서 촬영을 감행했죠. 폐건물 신에서는 조각을 발견할 수 없도록 벽에 붙어서 기어가야 했는데요. 그게 아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작진은) ‘이혜영 할머니도 못할 거야’ 하면서 썰매를 만든 거예요. 근데 리허설에서 된 거예요. 되니까 그냥 하는데 넓적다리가 터질 것 같더라고요. 무릎이 나갔어요. 스스로 노쇠함이 느껴졌어요.”
속상한 마음에 매일 현장 일지에 민규동 감독의 뒷담을 적었다고도 털어놔 웃음을 자아냈다. “촬영 내내 불안했어요. 부상은 계속 입는데 ‘다치기만 하고 보람이 없으면 어떡하지’, ‘부상 입고 회복이 안 되면 어떡하지’ 걱정을 많이 했어요. 매일 일지를 썼는데, 주로 감독님 원망과 현장에서의 어려움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 원망이 결국 미안함으로 바뀌길 절실하게 바라는 노트도 있더라고요. 베를린영화제에 갔는데 1번으로 감독님한테 미안하더라고요. 다음에는 ‘감독님이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했죠.”
그야말로 ‘살신성인’이다. 몸도 마음도 다 쏟은 이혜영이지만, 정작 작품의 저력은 투우 역을 맡은 배우 김성철에게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조각과 투우의 관계는 김성철 배우의 힘이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조각은 제거해야 할 애를 실수로 살려놓은 거고, 그걸 알고 해결하려고 한 것 외에는 관계를 만들 게 없어요. 조각이 ‘네가 나를 죽이러 온 게 아니구나’라고 깨닫기 전까지 김성철의 놀라운 힘이 작용해요. (상대적으로) 어리고 경험이 없는 것에서 오는, 저돌적이고 청순한 힘이에요. 한 살만 더 먹어도 안 나와요. 요 나이에 얘만 갖고 있는 게 있어요.”
이혜영은 ‘쓸모’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 작품에서 배우로서 ‘쓸모’를 증명했다는 점에서, 그의 가치는 더 높이 살 만하다. 이는 60대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투자를 받고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덕분이기도 하다. 1981년 데뷔한 여배우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고 있을까. 그는 조각에 대한 생각으로 답을 겸했다.
“배우 생활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여자 배우의 역할은 남자 배우의 상대적인 존재였는데,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가 다양해지긴 했어요. 하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대단해졌다고 착각할 필요도 없어요. 저는 여자의 한계를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각도 늙은 여자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녀가 놀랍게도 지닌 힘에만 집중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