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수 없는 나라의 청년들 [쿠키청년기자단]

일할 수 없는 나라의 청년들 [쿠키청년기자단]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은 채 쉬고 있는 ‘쉬었음’ 인구가 지난 2월 기준 50만명을 넘어섰다. 이가을 쿠키청년기자

열심히 달렸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을 구했고, 부지런히 회사에 다녔다. 200만원의 월급으로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쉽지 않았지만,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러나 갈수록 우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전문대 졸업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시와 차별이 계속됐다. 자주 고민했다. “나는 여기에서 쓸모없는 사람인가.” 새벽부터 나선 출근길, 달리던 지하철이 사고가 나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끝내 결심했다. 퇴사하기로.

그렇게 정현진(여·26)씨는 쉬는 청년이 됐다. 통계에서는 정씨처럼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은 채 쉬고 있는 사람들을 ‘쉬었음’ 인구로 분류한다. 구직활동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업자·취업 준비생과는 구별된다.

통계청이 이번 달 발표한 ‘2025년 2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청년층(15~29세) 쉬었음 인구는 50만4000명이었다. 지난 2003년 통계 집계 이래 최대치다. 전체 취업자 수는 늘었지만, 청년층 취업자 수는 오히려 줄어들기도 했다. 지난 2월 기준 15세 이상 취업자는 13만6000명 늘었지만, 20대 취업자 수는 22만8000명 줄었다. 

무기력에 빠진 청년들은 직장 생활 자체에 회의를 느낀다. 이가을 쿠키청년기자

“대기업은 포기했어요”…무기력에 빠진 청년들


청년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고 쉬는 이유는 무엇일까. 쉬는 청년 김지수(여·24세·가명)씨는 직장 생활 중 무기력에 빠지면서 구직활동을 관뒀다. 김씨는 “직장 생활을 하던 도중 우울증에 빠지면서 무기력증이 심해졌고, 열심히 해서 좋은 기업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그만두게 됐다”며 “우울, 무기력증과 같이 정신적 문제를 겪는 청년들도 많고,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며 미래를 꿈꾸지 않게 되어 쉬는 청년이 늘어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별하(여·35세)씨 또한 첫 직장에서 해고된 후 직장 생활 자체에 기대를 저버리게 됐다. 정씨는 “대학 졸업 당시에는 최저시급도 지키지 않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대기업은 신입을 아예 안 뽑으니 중소기업에 취직했는데, 모르는 걸 물어본다는 이유로 일을 못 한다며 잘렸다. 그 이후로는 회사에 다닐 의지가 사라졌다”고 털어놨다.

‘쉬었음’ 청년 정별하씨는 첫 직장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뒤 직장 생활 의지를 잃었다. 이가을 쿠키청년기자

지난달 한국고용정보원이 1년 이상 미취업 상태인 쉬었음 청년 318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쉰 이유로는 적합한 일자리 부족(38.1%·중복 응답), 교육·자기 계발(35%), 번아웃(27.7%), 심리적·정신적 문제(25%) 등이 있었다. 특히 과거 일자리가 저임금·저숙련·불안정할수록, 일 경험이 없고 미취업 기간이 길수록 쉬는 기간도 길었다.

전성신 니트생활자 공동대표(좌), 박은미 니트생활자 공동대표(우). 이가을 쿠키청년기자

쉬는 청년들의 사회적 연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니트생활자’의 박은미 대표는 “청년들이 쉬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활기찬 사람이라고 해도 계속 거절을 당하다 보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 사회에 진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는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쉬는 청년이 늘어난 본질적 원인…“일자리 격차 심화”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떨까. 하종강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쉬었음 청년 증가의 본질적 원인은 일자리 격차에 있다고 말한다. 하 교수는 “한국은 (일자리에서) 기업 규모별 격차, 정규직-비정규직 격차, 성별에 따른 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일본과 비교해 봐도 한국은 경쟁에서 이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소득 수준이 매우 크게 차이 난다. 그만큼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경쟁에서 탈락하는 게 너무 두려운 사회가 된다. 그게 쉬었음 청년 증가의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하종강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가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가을 쿠키청년기자

하 교수에 따르면, 일자리 격차가 본격화한 것은 1990년대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부터다. 이전까지 비정규직 및 간접 고용은 노동자에게 불리한 고용 형태로 간주해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IMF 이후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기업 회생을 이유로 이러한 고용 방식이 합법화됐고, 경제가 회복된 지금까지 고착했다. 하 교수는 “IMF 이후, 기업의 경제적 이윤 추구가 다른 모든 가치관보다 중요한 사회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일자리 격차가 커질수록 쉬는 청년들은 늘게 된다. 최윤식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중소기업 노동자가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시장에 진입할 때부터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으로 일하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며 “일자리 격차가 클수록, 구조적인 이동이 어려울수록 취업을 미루거나 쉬는 청년은 늘어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고용 불안은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하는 청년들에게 더 치명적이다. 최 교수는 “기업에서는 경력자들을 우대하기에, 노동시장의 고용 불안이 있는 이상 신규 취업자들은 진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갈수록 경력자들의 시장이 넓어지면서 신규 취업자들의 시장은 좁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최윤식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가을 쿠키청년기자

쉬는 청년 줄이려면 노동시장 근본적 변화 필요해


쉬었음 청년 증가의 원인으로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들이 지적된 만큼, 해결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최 교수는 “쉬었음 인구가 늘고 있다는 것은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화 속에서 고용 취약계층이 청년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라며 “고용 취약계층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동시장을 재편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 이후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노동시장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같은 가치를 지닌 노동에 대해 임금 차별을 두지 않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를 제시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만 시행되어도 임금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를 국가 단위로 시행하고 있으며, 여러 연구에서 경제 성장 효과가 증명되기도 했다.

하 교수는 “일자리에 따른 소득 격차가 적은 사회를 기다리며 절망할 게 아니라, 그런 사회를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 청년들이 직접 시민단체나 노동운동 단체 활동가로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삶을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가을 쿠키청년기자
decagram@naver.com
이가을 쿠키청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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