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흐는 유일하게 팔린 <붉은 포도밭> 이전에 <녹색 포도밭>을 그렸다.
빈센트의 작품 중 ‘유일하게’ 팔린 작품이 <붉은 포도밭>이다. 이는 유화만 따지면 맞는 말이다. 네덜란드 시절 구필 화랑의 화상이던 센트 숙부의 주문을 받고 <헤이그 풍경> 데생을 20길더를 받고 팔았다. 1882년 조카사위인 안톤 모베에게 수채화를 배우고 있을 때 테르스테이흐 씨가 수채화 소품 중 잘된 게 있으면 사주겠다 하여 빈센트를 고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언젠가 자신의 그림이 팔리리라 믿었다.
“테오야, 터널이 끝나는 곳에 희미한 빛이라도 보인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요즘은 그 빛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를 그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모델을 구하는 데 돈이 많이 들지만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도 돈을 쓰게 된다. 물론 가능한 한 아끼며 살기 위해 빈센트는 무료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할 일이 많은데 돈이 부족할 것 같아 그는 늘 걱정이었다. 모베나 테르스테흐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아마 둘 다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빈센트는 무엇보다 그림을 팔고 싶었다.
“테오야, 내 안에 어떤 힘이 있는 걸 느낀다. 난 그걸 밖으로 풀어놓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열정을 잃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네가 더 이상 돈을 보내줄 필요가 없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라는 희망찬 포부를 밝힌 게 1882년 1월이었으나 죽을 때까지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경매에 출품되는 유명 화가 줄리앙 슈나벨은 영화 <고흐, 영원의 문, 2018>을 만들었다.
칸 영화제 감독상을 탄 슈나벨이 영화 모티브로 <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노인 <영원의 문에서>를 사용하며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이다.
<슬픔에 빠진 노인>라는 제목으로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 그림은 1882년 네덜란드에서 그린 석판화를 1890년 생 레미에서 다시 그린 유화이다. 나무 의자에 앉은 노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빈센트의 개성이 드러나는 검은 아우트라인과 거친 터치의 해칭이다. 노인이 입은 파란색 환자복은 마치 죄수복처럼 보인다. 죄를 지어 신체를 구속해 놓은 것보다 통제할 수 없는 정신이상이 더 괴롭고 암울하다. 오렌지와 고동색, 수직과 수평으로 강조된 초록색 나뭇결은 불안을 고조시키고 잠식하게 만든다. 이미 정신 병원에 갇혀 있지만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노인이다.
“맙소사! 이곳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미쳐가는 모습을 보아왔다. 다른 사람의 감시 하에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 자유를 희생하고 사는 것, 기분전환을 할 방법은 오직 그림 그리는 일 뿐인 채, 사회에서 동떨어져서 지낸다는 것, 그런 건 정말 못할 짓이다.”
생 레미의 생활을 1년이 넘도록 참아온 빈센트는 지루함과 슬픔으로 숨이 막힐 듯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얼굴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주름살까지 생겼다. 이제 이곳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이상 그걸 끝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광기보다 강하다’며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테오에게 선언한다.

이는 빈센트의 전기 영화로 전 생애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그가 파리에서 아를을 거쳐 오베르에서 죽을 때까지 프랑스 시기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화가를 다룬 영화는 대사를 필사 하며 보는데, 10시간 정도 걸린다. 시나리오 작가가 대사 한 줄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보고 고심을 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화가가 되기로 한 뒤로는 빈센트는 언제나 굶주리고 외로웠다. 아를의 양치기 아가씨를 우연히 만나고 이런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나도 좀 어울리고 싶다. 함께 앉아 한잔하며 무슨 대화이든 나누고 내게 담배 한 대, 와인 한 잔이나 건네줬으면, 안부라도 물어줬으면, 그럼 대답하고 이야기를 나눌 텐데. 그리고 가끔 스케치도 그려 선물해 주면 받아 주겠지. 여자가 미소 지으며 물을지도 몰라, ‘배고파요? 먹을 것 좀 드려요? 햄이나 치즈? 아니면 과일?”
파리 화가들의 모임에서 햇볕을 찾아 밝은 곳으로 가길 원하는 빈센트에게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프랑스 남부로 가라고 한다. 그는 초기의 어둡고 침울한 주제에서 인상주의의 영향으로 빛을 찾아 떠난다.
빈센트의 초라한 장례식에 그의 작품을 관 주변에 늘어놓고 원하는 그림을 하나씩 가져가라고 테오가 말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이 내린다.
벨기에 인상주의 화가인 외젠의 누이 안나는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400프랑에 샀다. 아마 동생에게서 굶주리는 빈센트 이야기를 들었을 터이다. 동생도 기쁘게 하고, 빈센트도 도우며, 무엇보다 그림이 아름다웠다고 안나는 말하고 있다.
1906년 마티스의 그림을 수집하던 러시아의 컬렉터 세르게이 시슈킨이 10,000프랑에 이 그림을 다시 사들인다. 채 8년도 지나지 않아 25배가 오른 가격이다. 아를에서 빈센트가 고갱과 공동생활을 하며 테오에게 매달 250프랑씩 지원을 받았으니 이로 계산하면 3년도 넘게 받을 금액이다.
이렇게 작품가격이 오를 줄 알았다면 경제적인 부담으로 빈센트가 자살을 하지 않고 어찌되었든 버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하긴 화가의 자살로 가격이 올랐으니 하나마나한 생각이다. 이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세르게이 컬렉션은 강제로 국가에 귀속되어, 지금 푸슈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빈센트는 아를에서 멀지 않은 몽마주르 근처의 포도원에서 단 하루만에 완성한다. 자연은 한동안 '예외적으로 아름다웠고' 그는 그것을 포착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빈센트는 밝은 푸른 하늘 아래 여인과 포도 따는 사람을 빠르고 다양한 붓놀림으로 묘사하고, 수평선에는 아를의 라일락 실루엣과 농장의 주황색 지붕이 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반 고흐전의 작품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소장한 네덜란드 오테틀로의 크롤뢰 뮐러 미술관에서 왔다. <녹색 포도>를 이 미술관에서 발견하고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 오지는 않았다. 한 작가의 작품들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그 작품들 간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건 무엇보다도 지적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다.
안나에게 판매한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수확하는 그림이니, 이 <녹색 포도>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그려졌다. 곳곳에 누렇게 변한 포도 잎이 보이지만, 연보라색 포도는 아직 당도가 떨어져 따사로운 햇살을 좀 더 받으며 시간을 인내해야 한다.
그런데 수확하는 여인들의 허리가 완전히 굽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포도나무가 성인의 허리까지 오는데 반해, 아를의 포도나무는 땅에 거의 붙어서 자란다. 이는 남프랑스의 건조한 기후로 인해 포도나무가 땅속에서 수분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튀르키에 여행 중에도 이런 포도나무를 발견하고 신기해 물어보니 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당도도 높고 와인의 품질이 우수하다고 한다.

덜 익은 포도송이와 기름을 많이 섞지 않아 꾸덕꾸덕한 임파스토의 마띠에르를 확인할 수 있다. 수확을 기다리는 포도밭은 보라색, 빨간색, 노란색, 밝은 파란색 및 주황색 터치가 녹색 사이에서 춤을 추며 작품에 전례 없는 활력을 불어넣는다.
빈센트는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그린 포도밭 그림을 값이 싼 소박한 나무 액자로 만들라고 테오에게 말했다. 그러자 테오는 탕기 영감이 포도밭 그림이나 밤 풍경처럼 색채가 풍부한 형의 작품에 열광한다는 사실과 ‘그의 말을 형이 단 한 번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안타까워한다.
지금도 나는 ‘빌레로이 앤 보흐’ 광고를 보면 오르세의 <외젠 보흐>와 크롤뢰 뮐러의 <녹색 포도>가 떠오른다. 비록 안나가 <붉은 포도밭> 한 점만 구입했지만, 빌레로이 앤 보흐는 이로 인해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를 주고 있다. 예술과 기업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