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넘겨 이어지는 의료공백 상황으로 인해 대학병원의 임상시험이 줄고 신약·의료기기 개발은 차질을 빚고 있다.
16일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의약품 임상시험계획 조사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승인된 임상시험 건수는 총 944건으로, 전년 1018건 대비 7.2% 감소했다. 전공의 파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의 승인 건수는 778건으로, 2023년 같은 기간보다 84건 적었다.
특히 대학병원의 임상 참여가 위축됐다. 쿠키뉴스가 주요 대학병원별 임상 승인 현황을 살펴본 결과, 서울대학교병원의 지난해 연간 임상 건수는 326건으로, 전년(411건)에 비해 20% 줄었다. 세브란스병원은 지난해 273건으로 전년(321건) 대비 14% 하락했다. 서울아산병원은 지난해 257건의 임상을 진행했지만 2023년 266건보다는 감소했다. 삼성서울병원은 241건, 서울성모병원은 144건으로 전년 대비 각각 12%, 21% 낮아진 것으로 확인됐다.
현장에서는 임상시험이 줄어든 원인으로 ‘의정갈등’을 꼽았다. 지난해 2월부터 시작된 의정갈등은 대규모 전공의 이탈을 일으켰고, 이후 대학병원 교수들은 업무 과부하에 걸렸다. 서울 지역 상급종합병원의 한 신경과 교수는 “교수들이 1년 가까이 당직을 서고 있다”며 “지난해는 임상시험이나 연구를 진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료공백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 올해 역시 연구 활동이 활발하진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임상시험 축소는 산업계의 연구개발(R&D)에 타격을 입혔다. 임상 기간이 연장되면서 개발 비용은 늘어나고, 제품의 출시나 적응증 확대도 늦어지고 있다. 업계는 의료공백이 지속될 경우 실적이 낮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3월 항암제 임상 1상 승인을 받은 A기업은 올해 들어서야 임상기관과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9개월간 여러 상급종합병원에 제의를 했지만 ‘임상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A기업 관계자는 “상급종합병원 규모의 임상기관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며 “임상 진입로가 좁아진 가운데 병원들이 의뢰비가 큰 대형 제약사 위주로 임상을 먼저 추진하다보니 스타트업은 연구를 시작하는 것조차 힘든 실정”이라고 호소했다.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B기업은 지난해 일부 병원으로부터 임상시험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B기업 관계자는 “병원 측은 전공의들이 대거 파업에 참여하면서 임상을 진행할 수 있는 책임연구자가 부족해 연구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했다”며 “다른 병원과 임상을 계속 추진했지만 일정은 상당 부분 지연됐다”고 했다. 이어 “임상시험수탁기관(CRO)·임상시험코디네이터(CRC) 관리 비용 등 고정적으로 발생하는 비용 부담이 커졌고, 제품 출시가 연거푸 미뤄져 매출 계획도 불투명하다”라며 “이러한 상황은 한정된 자원으로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스타트업 입장에선 사업의 존속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다”라고 짚었다.
정부는 의사들이 임상 연구를 전개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7일 ‘임상 연구의 요양급여 적용에 관한 기준’ 일부개정안을 행정고시하고, 올해 1월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번 개정안은 임상 현장에서 의료진 주도로 실시하는 ‘연구자 주도 임상 연구’가 공익적 목적을 가진 경우 급여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도록 기준을 정비했다. 제약사 등이 의료진에 요청해 진행하는 ‘의뢰자 주도 임상 연구’도 공익적 목적이 크다면 요양 급여를 적용받을 수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임상 연구 확대를 위해 급여 심의 절차와 기준을 개선했다”며 “급여 적용을 받은 연구에 대한 사후 관리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