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시는 3·1절을 하루 앞둔 29일, 유 열사가 이끈 아우내만세운동이 일어난 병천면에서 아우내봉화제를 연다. 횃불행진을 하는 저녁이 되면 언론사 사진기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신문은 3월 1일자 사진으로 최적이다.
1947년 11월 27일, 77년 전 이날도 전국적 이목이 시골 병천면으로 쏠렸다. 해방된 지 2년만에 유관순 순국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기념사업회가 조직돼 기념비를 제막했다.
김구·이시영·한훈 등 독립지사들이 추도문을 보내고 전국에서 1만여 명이 찾아왔다. 기념비 글은 정인보가 짓고, 글씨는 김충현이 해방 후 처음 한글로 썼다. 비 제목이 우렁차다. ‘긔미(기미)독립운동때 아내(아우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최(자취)라’ 보기드문 서술형 비제목이다.
기념사업회 간부는 저명한 사회인사들이었지만 모든 실무는 병천 주민들이 맡았다. 만세운동 현장에서 19명이 순국했으나 주민들은 해방될 때까지 내놓고 슬퍼하지도 못했다. 이 해 2월 28일자 신문에 ‘순국의 처녀’라는 글이 실려 유관순 순국사실이 알려지고 추모사업이 벌어졌다.
병천 주민들이 앞장섰다. 희생자 및 유족 조사를 직접 했고, 영화 제작도 도왔다. 기념비 제작 및 제막식 준비까지 주민들이 했다. 비용 마련을 위해 모금운동을 펼쳤다. 가전리 김상훈, 구도리 이용규, 수신면 오용환 등 주민 200여 명이 돈을 냈다. 한약방·정육점·정미소를 운영하는 형편 좋은 주민은 500원 이상, 농사짓는 주민들은 100~300원을 냈다. 국민(초등)학생들도 돈을 모았다. 병천국민학교 2200원, 목천국민학교 1000원, 수신국민학교 1500원, 성남국민학교 1500원 등이다. 당시 쌀 한 말 값이 500원. 해방 직후 어려운 생활 형편인데 주민들은 순국한 이웃들을 기억하려 발 벗고 나섰다.
추모사업 보고서 성격의 문서가 남아있어 당시 상황을 살필 수 있다. 1947년 병천면은 27년 전 만세운동 때의 격앙된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그해 10월 21일 영화 촬영을 위한 만세운동 재현에 주민 3000여 명이 호응해 제작진을 놀라게 했다.
“태극기를 가슴에 꽂고 갓을 쓴 노인 등 남녀노소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군중들은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자 장터가 떠나갈 듯이 만세를 불렀다. 영화 촬영대를 따르는 수백의 군중은 커트마다 감격이요, 장면마다 눈물이었다.”
기념비는 일제가 강요해 만든 황국신민서사탑 비면을 갈아 사용했다. 주민들은 “이런 탑을 우리 선열 충혼비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하며, 하늘의 열사 영령도 얼마나 기뻐하시겠냐”며 전승탑으로 여겼다. 병천 인근 주민들까지 나서 기념비 터를 닦고, 진입로 내는 일을 도왔다. “수천 군중들이 원기왕성하고 즐겁게 일하는 광경은 오로지 선열의 거룩한 정신을 추모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보는 이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금치 못하게 했다.”
1947년 당시 남한은 좌우대립이 극심했다. 36년 이민족 통치를 받은 조국이 이젠 남북분단 위기에 놓였다. 어느 때보다 민족 화합이 강조됐다. 온 민족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민족지도자들이 유관순과 아우내만세운동 기념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당시 정치 상황이 18세 순국 소녀에 대한 기억 소환을 필요로 했다.
독립지사들 추도사는 한결 같았다. “좌우갈등의 조국 현실이 부끄럽다. 완전독립에 여생을 바치겠다. 선열들이여 도와주소서.” 병천 주민들도 기념비 건립 발의문에서 “가장 포악한 희생을 당한 우리 고장의 사적을 널리 알려 우리 민족끼리 단결해야 독립도, 자유도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고 밝혔다.
※참고논문: 조한필 ‘유관순 발굴 과정의 검토’(백산학보 2019) ‘1947년 아우내만세운동기념비 건립의 역사적 의의’(역사와 담론 2022)
/천안·아산 선임기자, 문학박사(한국사) chohp1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