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의사선생님을 위한 세레나데 [안태환 리포트]

노(老)의사선생님을 위한 세레나데 [안태환 리포트]

글‧안태환 의사, 칼럼리스트


단언컨대 의사로서 진료를 위해 차고 넘치는 임상경험은 없다.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환자들의 질환 상태와의 생경한 대면은 의료현장의 보편적 일상이 된지 오래이다. 그러하기에 완벽한 의사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불안정을 딛고 안정을 위해 정진하는 태도만이 의사로서의 존립기반일 것이다. 이 경우 임상의 경험치는 매우 위대하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근간에는 수능 최고 성적의 수재들이 의대에 간다. 수능 성적과 공감 능력은 비례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 배제된 두뇌와 실력은 개인에게는 축복일지 모르나 환자나 사회 공동체로서는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의료계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환자와의 교감과 배려의 덕목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절대가치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많은 병의원이 도산을 했다. 적지 않은 병의원들의 경영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규정된 수가와 치솟는 인건비는 동네병원의 안정적 운영을 힘들게 한다. 의료 선진국의 자화상으로 칭송받는 지척거리 병의원의 말 못 할  내면이다.

의과대학 졸업 후 대학병원에서의 수련 이후 개원의로서 25년을 살아왔다. 매번 봉착하는 난제는 환자를 잘 돌볼 수 있는 동행 의사의 부재였다. 한때 “없으면 후배들을 키우는 수밖에.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 환자 진료에 대한, 수술에 대한 물리적 이격도, 치료적 이견도 괜찮다. 중요한 건 환자에 대한 같은 의사로서의 설득되는 마음의 공감이니까”라며 달려온 지난한 세월이었다. 

병원이 도처에 위치해있지만 환자의 마음을 헤아려줄 선한 의사는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시민의 마음은 온당하다. 이익보다 인술에 대한 접근으로 다가선 진료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만족할 만한 단 한 치의 병원 서비스 변화를 위해 동료 의사 누가 먼저 나설지를 가늠하지 않아도 의사로서의 권위의 힘을 빼는지, 자기 것을 스스럼없이 내놓는지, 내세우지 않고 슬그머니 배려하는지를 담대하게 보고 싶었지만 급여를 따라 환자 수요를 따라 생존이 시급한 의료계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그럼에도 부덕한 개원의의 소치라고 자책할 수밖에.

최근 병원에 새로운 의사선생님을 초빙하였다. 30년 넘게 개원의로서 의료현장에 계시다 여러 사정상 진료를 멈추신 선생님은 고희를 앞두신 적지 않은 연세이시다. 까마득한 후배의 병원에서의 동행을 결심하기까지 여러 고민이 많으셨을 터이다. 젊은 의사들을 선호하는 의료계의 풍토 속에서 우리 병원은 나이 드신 선생님의 풍부한 진료 경험을 선택하였다. 선생님의 숱한 환자와의 시간들은 더 좋은 병원을 만들어 가는데 큰 자양분이 될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전자차트와 의료장비들을 능숙히 다루는 젊은 의사들보다는 때론 더딘 진료겠지만 숱한 임상 경험을 그 누구도 앞서진 못할 터이다.

무조건적인 항생제 처방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자가 면역을 중심으로 최소한의 항생제 처방으로 환자 본위의 진료를 실행하고 계신다. 소아과 진료가 힘든 의료계 현실 속에서 점차 많아지는 아이들 진료에도 밝은 웃음과 예의를 지탱하신다. 세상 모든 것들이 빠르고 편익함을 추구하지만 선생님의 진료와 처방은 느림의 의학이다. 어쩌면 아날로그 의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 중심의 의술이다. 임상경험에 근간한 과학적이면서 객관화된 치료이다.  

세상 모든 이들은 현재의 위치를 스스로 밀고 올라간 것으로 자만하는 실수를 범한다. 지금의 위치가 자신만의 온전한 능력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자기 객관화에서 나온다. 의료현장으로 다시금 돌아온 의사 선배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코로나 초기, 암울한 시간 속에서도 감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원봉사를 자청했던 이들도 연로한 선배 의사들이셨다. 응시 없이 이뤄지는 직시는 없다. 오늘날의 의료 발전은 대개 선배 의사들의 덕이다.

우리 병원에는 옹골진 옹이 같은 견고함으로 노(老)의사선생님께서 진료를 보고 계신다. 환자도 의사들도 선생님의 존재가 있기에 든든해진다. 노(老)의사는 위대하다.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이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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