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할머니…” 한국인 뿌리 찾아준 조모 사망소식에 추성훈 오열

“아! 할머니…” 한국인 뿌리 찾아준 조모 사망소식에 추성훈 오열


[쿠키 스포츠]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전지훈련 중인 추성훈(34·사진)은 7일(현지시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가 생을 마감했다는 비보였다. 자신의 뿌리를 찾게 해주었던 할머니를 더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추성훈은 비통한 심경을 블로그를 통해 밝혔다.

“전화를 받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훗날 아이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 힘겨운 삶을 더 견뎌내겠다.”

재일교포 3세 추성훈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아키야마 요시히로(秋山成勳). 그를 추성훈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미국에서도 그는 아키야마로 불린다. 일본인 아키야마다.

추성훈은 재일교포로서 1974년 전국체전에 출전, 유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아버지 추계이씨의 영향으로 3세 때부터 유도를 시작했다. 학창시절 일본 전국대회에서 명성을 날렸던 그는 태극마크를 달겠다는 일념으로 1998년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시청 유도팀에 입단했다.

태극마크를 달 수 있다는 벅찬 감격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재일교포들 대부분 겪었듯이 일본에서 ‘조센징’이었던 추성훈도 한국에서는 ‘쪽발이’였다. 차별로 인한 온갖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태극마크를 달지 못하자 그는 3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해 유도복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아키야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유도 81㎏급 결승에서 한국 선수를 꺾고 금메달을 차지하는 희·비극을 연출한 뒤 “가슴 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의 모 스포츠신문은 추성훈의 승리에 대해 ‘조국을 메쳤다’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달아 그의 가슴을 다시 한 번 휘저어 놓았다.

추성훈에게 한국도, 일본도 버릴 수 없는 나라였다. 일본은 모국에서 버린 자신을 받아주었으나 정작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05년 일본 종합격투기 K-1으로 전향한 뒤 유도복 양팔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새겼다.

경기장에 등장할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가라”며 야유를 보내는 일본 관중에게 그는 오히려 큰절로 예를 갖췄다. 미국 종합격투기 UFC로 옮긴 7월 앨런 벨처와 가진 첫 경기에서도 트렁크 팬츠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붙이고 나왔다.

이처럼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추성훈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등질 수 없었던 데에는 재일동포 1세대인 할머니의 영향이 컸다. 추성훈은 고향 오사카를 떠나 도쿄에서 홀로 새 둥지를 텄던 4년 전 같은 지역 양로원에서 요양 중이었던 할머니를 자주 만났다. 할머니는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그는 추억한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은 그를 깊은 슬픔 속에 빠뜨렸다. 추성훈은 이달로 끝나는 전지훈련 일정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당장 일본행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했다. UFC 정상을 밟는 것을 할머니가 더 기뻐하시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부산과 대마도 사이를 육로로 연결하고 싶다’는 마지막 꿈도 포기하지 않았다.

추성훈의 마지막 꿈이 이뤄지는 순간 재일교포 1세대로 할머니가 눈물을 뿌리며 건넜던 대한해협에는 희망의 다리가 세워질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김철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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