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 한·일 월드컵’의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대한축구협회(KFA)는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22 KFA 아카데미 지도자 컨퍼런스’를 진행했다. ‘2002 한·일 월드컵’ 2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 박지성 전북현대 어드바이저, 이영표 강원FC 대표이사가 대담을 가졌다. 2002 월드컵의 과정, 성공의 원동력이었던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 20년 전 영광을 넘어서기 위한 방향 등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이어졌다.
히딩크 전 감독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한국 감독직 부임 이후 처음 훈련 소집을 가졌던 때가 생각난다. 좋은 날씨를 예상했는데 영하로 떨어지면서 굉장히 추웠던 기억이 난다”라며 “선수 선발에 임했다. 당시 한국 대표팀과 선수 구성은 현대 축구에 뒤처져 있었다고 생각했다. 어리고, 모험을 즐기고, 강한 요구에도 끝까지 수용할 선수들을 뽑았다. 박지성과 이영표 모두 명단에 있었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꼽았다.
이어 “2002 월드컵은 긴 여정이었다. 한국 축구 역사를 봤을 때 월드컵 본선이 5차례 있었지만 승리는 없었다.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했고 1년 반 동안 어려운 길을 선택했었다. 당시 협회나 이용수 부회장에게 요청했던 부분이 많았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줘 긴 여정을 잘 이끌어갈 수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히딩크 감독은 “신체와 정신력을 개선해야 했다. 정신력의 경우, 강팀을 상대할 때 상대의 신체 능력에 너무 과하게 반응했다. 한국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을 보고 겁을 내는 것 같았다”라며 “나는 '우리의 능력도 충분하다. 저런 덩치 큰 선수들 상대로 너희 능력을 보여라‘라고 요구했고, 선수들은 그렇게 해냈다. 2002년 2, 3월에 걸쳐 집중 훈련을 하면서 신체능력 면에서 큰 향상을 이뤘다.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를 계속 이겨냈다”고 회고했다.
박 어드바이저와 이 대표이사는 포르투갈전을 꼽았다. 당시 한국은 조별예선 3차전에서 포르투갈을 1대 0으로 승리했는데, 이 대표이사의 크로스를 받아 박 어드바이저가 트래핑 이후 감각적인 슈팅으로 골을 넣었다. 합작한 골에 힘입어 한국 축구대표팀은 월드컵 최초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박 어드바이저는 “어렸을 때부터 국가대표와 월드컵을 꿈꿨는데 월드컵 골이라는 상상만 했던 일을 어린 나이에 이룰 수 있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 대표이사 역시 “한국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하지 못했다. 우리의 목표는 16강이었다. 그 목표를 결정짓는 경기였다. 나도, 우리 팀도 포르투갈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설명했다.

히딩크 전 감독은 박 어드바이저와 이 대표이사의 선수 시절에 대해 “처음 한국 감독직을 맡아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기 시작하면서, 팀 스타일을 바꾸고 싶었다”라며 “팀이 너무 보수적이고, 구식이고 수비적이었다. 월드컵에서 성과를 내려면 스타일을 바꿔야 했고 새로운 선수들이 필요했다. 특히 어린 선수들이 필요했다. 지나치게 수비적이었던 당시 한국에서 활용해야 했던 게 현대적인 선수들이었다. 그게 박지성과 이영표”라고 되돌아봤다.
이 대표이사는 히딩크 전 감독에 대해 “보통 경기장에 나설 때 갖는 ‘잘해야겠다, 이겨야겠다’는 이런 생각이 아니라, 나에게 ‘오늘 감독님을 위해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하는 감독님”이라며 “지금 생각하면 이런 게 ‘가스라이팅’인가 싶기도 하지만(웃음), 내 마음을 완전히 지배했다. 감독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따라갔다”라고 말했다.
박 어드바이저 역시 “처음 외국인 감독님 밑에서 훈련하게 됐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이 있는 것이 완전히 달랐다고 생각한다. ‘나를 어느 정도나 이끌어낼까’라는 기대감을 처음으로 느꼈었다. 단순히 지도를 할 뿐 아니라 개개인마다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고,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감독님”이라고 설명했다.

히딩크 전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 PSV 아인트호벤 감독직을 맡으면서 박 어드바이저와 이 대표이사를 함께 영입해 네덜란드 무대로 갔다.
이 대표이사는 “아인트호벤 입단 초기에는 훈련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패스 연습을 하는데 내 패스 타이밍이 너무 늦어 선수들이 내게 불만을 말했다. 그 불만이 싫어서 연습마다 엄청나게 집중했고, 3개월 정도 지나 비로소 자연스럽게 훈련 템포를 따라가게 됐다. 그제서야 빠른 템포의 축구가 재밌다는 걸 알게 됐다”라며 “그리고 잉글랜드에 가니까 네덜란드보다도 더 빠른 축구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적응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성공적인 경력에 확실히 도움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히딩크 전 감독은 “박지성과 이영표가 PSV에 왔을 때 배우기만 한 게 아니고, 기존 선수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줬다. 그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마음 가짐이다. 셔틀런 훈련을 할 때, 선수들이 하나 둘 지쳐서 멈추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남아서 기절하기 직전까지 뛰었던 두 선수가 박지성과 이영표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은 유럽 선수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줬다”고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들은 유소년 선수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히딩크 전 감독은 “어린 나이부터 특정 목표를 가지고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많다. 특히 이런 목표와 부담을 부모들이 주는 경우가 있다”며 “어릴 때부터 축구를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린 나이에 축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 나이대 선수들은 실수가 허용된다. 실수하고 해결책을 찾으며 성장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히딩크 전 감독은 “한국에 부임해 유소년 지도 현장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선수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강하게 다그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어린 선수들은 실수하고 해결책을 찾으면서 발전한다. 실수해도 괜찮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박 어드바이저 역시 “어느 시점에 해외로 진출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손흥민이나 이강인 같은 경우 어린 나이에 떠나 적응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를 거친 다음에 유럽으로 간다면 환경, 문화, 축구 스타일에서 다른 부분이 있어 힘들 수도 있다. 유럽 진출을 원하는 선수들이 있다면 언어를 배웠으면 좋겠다. 언어를 갖고 있다면 소통하는 데 있어 편할 거고 분명 훈련과 경기에 있어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동의했다.
이 대표이사는 유소년을 육성하는 지도자들에게 “내가 여렸을 때 연습 경기를 했을 때 당시 감독님에게 ‘똑바로 하라’는 말을 8번이나 들었는데, 끝내 뭘 똑바로 하라는 건지는 가르쳐주지 않더라. 가장 안타까운 건 선수들이 창의적인 패스를 시도하지만 기술이 부족해서 실수를 범할 때 감독이 ‘안 되는 거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지적을 받으면 선수의 창의력이 사라지고 발전이 안 된다”고 당부했다.
끝으로 한국 축구 발전에 대해 박 어드바이저는 “계획이 있어야 하고 하나하나 달성한다면 언젠가 월드컵 결승에 오를 수준으로 플레이할 거라 생각한다. 세계 최고 레벨의 선수를 얼마큼 보유했는가, 그만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가부터 시작이다. 그런 선수들을 배출하기 위해 어떻게 환경을 만드는지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이사는 “월드컵 결승 진출은 우리에겐 웃음부터 짓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가장 중요한 건 본질이라 생각한다. 월드컵 결승을 생각하기 전에 본질부터 생각해야 한다”라며 “좋은 지도자가 좋은 환경에서 좋은 프로그램으로 좋은 선수를 가르치면 좋은 축구를 하게 된다. 4가지 카테고리를 완성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행정, 재정,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언젠가 가능하다고 느낄 날이 올 것”이라고 희망했다.
히딩크 전 감독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가 무엇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결국 어린 선수들의 발전에 집중하면 축구 수준이 올라가고, 나중엔 16강, 8강을 넘어 어쩌면 결승까지 갈 수 있길 바란다”라며 “한국이 카타르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가나, 우루과이와 편성돼 있다. 어려운 상대들이며, 16강을 통과만으로도 큰 성과다. 다만 16강 진출보다 더 중요한 건 한국 축구가 매력적인 축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탈락하더라도 ‘저 팀은 훌륭했어, 현대축구를 추구하는 팀이야’라는 말을 듣을 수 있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언젠가 결승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암=김찬홍 기자 kch0949@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