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바빠’ 빨리 보고 짧게 보는 청년들 [지금, Z세대]

‘바쁘다 바빠’ 빨리 보고 짧게 보는 청년들 [지금, Z세대]
드라마 재생속도를 2.0배속으로 조절해서 감상할 수 있다. 티빙 캡처

# 정모(26·직장인)씨는 예능이나 드라마를 볼 때 1.5배속, 혹은 2배속으로 감상한다. 깊게 몰입하거나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콘텐츠가 아니면 30초 건너뛰기 버튼도 자주 누른다. 재밌는 콘텐츠는 많고, 퇴근 후 시간은 짧기 때문이다. 빨리 보기 덕분에 짧은 시간에 많은 작품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젠 콘텐츠를 선택해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져, 스스로 재생 속도를 컨트롤하지 못하면 불편할 정도다. 오랜만에 정상 속도로 보던 중 내용이 늘어지는 느낌이 들면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고 싶어진다.

최근 청년층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빠르게 시청하는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정속보다 빠른 속도로 설정해 보거나, 재미가 없으면 10초, 30초 후로 뛰어넘으며 감상한다. 현재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와 유튜브는 1.25배속, 1.5배속, 1.75배속, 2배속으로 재생하는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왓챠, 디즈니+ 등 배속 감상 기능이 없는 OTT 구독을 꺼리는 시청자도 있다.

 
“정속으로 보면 답답해요”


모든 콘텐츠를 빠른 속도로 감상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기준이 있다. 빨리 보는 기능을 처음 인식한 중학생 시절부터 배속으로 영상을 봤다는 최모(28·공무원)씨는 “전개가 답답하거나 이야기가 늘어질 때, 작위적인 신파가 있을 때 배속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영상미가 뛰어나거나 전개가 느려도 괜찮은 영화는 정속으로 본다. 하지만 연작으로 된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은 내용을 빨리 알고 싶어서 1.5배속을 본다. 최씨는 “드라마는 클리세가 많고 전개 방식이 익숙해 빨리 봐도 내용 습득에 문제가 없다”라며 “한국 사람들은 빠른 걸 좋아하지 않나. 고효율로 엑기스만 뽑아내면 된다”고 말했다.

전체 영상을 짧게 쪼갠 클립 영상으로 콘텐츠를 감상하는 방법도 있다. 영화나 예능을 클립 영상으로 감상한 지 10개월 정도 됐다는 백수빈(27·직장인)씨는 “클립으로 영화를 보면 무료함을 느끼지 않고 핵심 줄거리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예능도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장면만 편집한 영상을 찾아본다. 이미 주변에도 클립 영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지인이 많다. 그는 “원치 않는 요소를 배제하고, 자기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이 같은 시청 습관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빠른 감상에 익숙해지면 이전의 정속 감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 정모(24·대학생)씨는 처음엔 영화와 드라마는 정속으로 봤고, 유튜브만 배속으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속으로 보는 일이 점점 어색해졌다. 최근엔 음악 감상 외엔 모두 배속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정씨는 “오랜만에 정속으로 보면 너무 답답하고, 계속 영상 길이를 확인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요즘 넷플릭스에서 새 시리즈가 나와도 내용 요약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오고, 숏폼 콘텐츠도 많아졌다”라며 “사람은 더 편하고,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지지 않나. 굳이 긴 시리즈를 다 보려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바쁘다 바빠’ 빨리 보고 짧게 보는 청년들 [지금, Z세대]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 표지

“제대로 보려면 정속으로”

최근 청년들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빠르게 감상하는 문화가 확산된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책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쓴 일본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는 과거에 비해 감상할 영상 콘텐츠가 많아졌고, 바쁜 현대인들에게 시간 가성비가 중요해졌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TV가 아닌 휴대전화나 태블릿으로 영상을 즐기게 됐고, 여럿이 같이 보던 문화에서 혼자 보는 문화로 변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친구들과 SNS와 모바일 메신저로 소통하는 청년들이 대화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많은 콘텐츠를 봐야 하는 상황도 변화의 배경으로 제시했다. 또 대사로 모든 것들 설명하는 영상이 많아진 것 역시, 시청자들이 내용 이해 중심으로 얕은 감상을 하게끔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문제점도 존재한다. 이야기 중심으로 핵심만 이해하는 감상 방식은 콘텐츠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콘텐츠를 제대로 보려면 정속으로 봐야 하는 게 맞다”라며 “느린 속도도 콘텐츠 일부분이고, 스토리 외에 정서와 감정 역시 중요하다. 그걸 경험하지 못하는 걸 제대로 된 문화소비로 보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콘텐츠 소비자가 소비 방식을 선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정 평론가는 “콘텐츠를 밖에서 휴대전화로 보는 일도 많고 긴 콘텐츠를 봤다는 만족감 때문에 빨리 소비하는 문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라며 “자기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선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거를 수 있는 건 걸러야지, (남들이 본다고) 휘둘려서 선택하지 않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창작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 16부작, 20부작 드라마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8부작, 12부작으로 짧아지는 추세다. 최근 공개한 넷플릭스 ‘썸바디’과 디즈니+ ‘형사록’은 8부작이었고, tvN ‘작은 아씨들’과 왓챠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12부작으로 제작됐다. 16부작으로 만든 디즈니+ ‘카지노’와 넷플릭스 ‘더 글로리’는 8부작으로 나눠 두 번 공개하는 전략을 택했다. 티빙 ‘술꾼도시여자들’, ‘욘더’처럼 30분 분량 드라마도 하나 둘 나오는 추세다.

감독이 직접 빠른 감상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다. ‘썸바디’ 정지우 감독은 지난달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썸바디’는 2배속으로 보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라며 “2배속으로 봐도 괜찮은 작품이 있지만, ‘썸바디’는 2배속으로 보면 ‘뭔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반응을 피할 길이 없어보인다. 괜찮으시면, 천천히 봐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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