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4)

명암을 대조적으로 다룬 카라바조와 루벤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4)
벨기에 안트베르펜 노트르담 대성당과 그로트 광장의 루벤스 동상. 

오늘날의 벨기에와 남부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플랑드르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가톨릭 국가로 남아 예술가들이 종교화를 제작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권력자나 교단에서 주문을 받아야 값도 비싸고, 왕궁이나 성당 등 천정이 높은 공간에 전시할 대형작품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개신교도의 땅’인 네덜란드에서는 1566년 캘빈 교도가 주축이 되어 천주교 성상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장식 그림까지 훼손하는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 환경이기에 그곳의 화가들은 대형 작품 대신 자신의 전문분야인 정물화, 풍경화, 풍속화 등 중산층을 위한 소형 작품을 그려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만약 루벤스의 어머니가 남편이 죽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안트베르펜 대성당에서 그의 걸작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플랑드르의 바로크 미술은 단 한사람,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독무대가 되었다.​


영국 대사는 루벤스를 가리켜 “화가들의 왕자이자 왕자들의 화가“라 호평했다. 이는 티치아노를 ‘화가들의 황제’이라 불린 것에 빗댄 찬사였다. 그는 플랑드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군주들을 위한 전 유럽의 궁정 화가이며 외교 밀사였다. 그의 작품에는 남부와 북부 유럽 스타일이 융합되어 있었다.

루벤스는 국제적인 명성과 개인적인 행복을 함께 누린 흔치 않은 화가였다. 그는 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벤스의 화실을 방문한 한 손님은 “그가 그림을 그리며 라틴어로 오비디우스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감상하고, 가끔씩 대화를 하며 편지를 받아쓰게 하는 등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를테면 루벤스는 쇼맨쉽도 있었고, 자기자신을 홍보할 줄도 알았다.

그의 아틀리에는 전시장일 뿐만 아니라 인플루언서의 파티장이었다. 그곳은 핫 플레이스였고, 그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상류층임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들의 특징은 마치 조증(躁症) 상태가 지속되는 정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머리 속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이며, 에너지가 계속 솟구치기 때문이다.

약 2,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의 작업량은 피카소에 견줄 수 있다. 르네상스형 인간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회화 부문에서 루벤스는 창조적인 천재이며, 다빈치가 하루에 20시간 일했던 것처럼 루벤스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밤늦도록 일했다.​

​루벤스는 "나는 물감을 캔버스 위에 과감하게 칠하겠다"라 말했다. 이런 각오로 루벤스는 어떤 이념보다 감정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색채와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따라서 루벤스의 색채는 명암의 부드러운 대립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밝은 색이 화면을 지배한다. 

이점이 바로크의 문을 연 이탈리아의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10)와 명암에서 정반대인 특색이다. 카라바조가 보여주는 어둠 속의 광선은 신비한 종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극렬한 명암 대립이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4)
카라바조, 그리스도의 매장(Deposition from the Cross), 1600~04년경, 캔버스에 유채, 300x203cm, 사진=바티칸 미술관 

루벤스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카라바조는 도망자로 떠돌고 있었기 떄문에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루벤스는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을 보았고, 그것의 명암과 대각선 구도는 루벤스의 '십자가 세움'과 '십자가에서 내리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위대한 걸작 중 하나로,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주문한 초대형 크기이다. 이는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창립자 성인 필립 네리를 위해 키에사 누오바 성당에 헌정되었다.

교황은 성 필립 네리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영성을 일으켜 진정한 교회의 기초를 다시 세우기를 원했다. 이에 카리바조는 석관 뚜껑을 크게 그려 미술적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아주 진한 어둠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카라바조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의 고통을 치룬 그리스도가 무덤에 묻히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했다. 그러나 이상적이지 않고 평범하다. 오히려 성녀들이 보는 앞에서 요한은 겨드랑이를, 니고데무스는 무릎 안쪽을 잡고 축쳐진 그리스도 몸을 석관 뚜껑 위에 눕힌다. 

로마 중기 성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카라바조와 어울려 길거리를 활보하던 친구들로 거지, 협잡꾼, 건달, 노름꾼, 그리고 호색한 등이었다. 카라바조는 태생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다스리지 못해 살인과 폭력 그리고 절도로 6년간 15번이나 수사기록에 등장하였다. 감옥도 6~7번이나 갔다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이전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 제자들과 여인들을 미화시키지 않았다. 목수, 어부, 세리 등의 직업을 가진 제자들을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거칠고 단단한 하층민으로 사실대로 묘사했다. 카라바조는 그들을 예술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성과 속의 뒤섞임이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르네상스 미술 전문가 김상근 교수는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2016>에서 '그리스도의 매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카라바조가 추구하던 테레브리즘(Tenebrism)에 따라, 작품 속의 인물들은 상반된 빛과 어둠 사이에 긴박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는 구원의 손길이 이들에게 바짝 다가가 있다. 그 빛은 대칭을 이루며 예수의 시신 위로 신비롭게 빛나고 있다." 이탈리아 어로 테레브라(Tenebra)는 어둠을 의미한다. 

그들 뒤로는 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글로바 마리아가 있다. 일행 모두 그리스도를 향해 구부린 자세이나, 글로바 마리아만 애통함에 팔을 위로 뻗는다.

캄캄한 어둠으로 인해 글로바 마리아의 비통함은 그리스도의 축 늘어진 몸과 대칭을 이루며 더욱 극명하게 긴장감을 자아낸다. 카라바조는 대상을 대하는 방식 및 색과 빛의 사용에 대해서는 혁명가이다. 그는 17세기 ‘바로크’ 사실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 작품은 많은 이들을 매료시켰고, 나폴레옹은 이를 1797년 파리로 가져갔다. 나폴레옹 실각 후 1815년, 프랑스 정부는 로마의 키에사 누오바 성당에 되돌려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성당에 모셔진 '피에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4)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8~1499, 대리석, 195x174cm, 성 베드로 성당, 위키백과 

루벤스는 '그리스도의 매장'을 모작했다. 그러나 카나다 국립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에서 손을 들고 있는 글로바 마리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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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매장', 1613~15, 나무에 유채, 88.3x65.4cm, 캐나다 국립미술관. 

루벤스가 카라바조와 미켈란젤로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예술가라도 특정 작품이나 소수의 대가에게서만 영향을 받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물론 영향도 받았지만, 예술가 자신이 치열하게 모색하는 과정 중 변곡점이 될만한 대변혁의 전환점을 여러 차례 맞으면서 거장으로 스스로 성장해 가는 것이 보통이다.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4)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자화상, 1639, 109.5x 85cm, 사진; 빈 미술사 박물관.

이 자화상은 루벤스가 사망하기 일 년 전, 63세에 마지막으로 그린 것이다. 왼손은 고상하게 칼자루를 잡고 있고, 그림을 그리는 오른손은 “관절염에 대한 암시로 장갑을 끼고 있는 듯하다”라고 어느 미술사가는 해석하기도 한다. 루벤스의 작품을 제작한 판화가들은 특별히 훈련을 받아 항상 손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의 예수회 교단, 플랑드르의 가톨릭 사제들, 프랑스의 루이 13세, 황제의 모친 마리 드 메디치, 루벤스에게 작위를 하사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3세 그리고 영국의 찰스 1세 등 최고위층에서 많은 주문을 받았다.

화가로서 최고위층과 접하다 보니 외교 사절로 융숭한 대접도 받았다. 그리고 그들과 친분을 쌓은 결과 영국과 스페인을 화해시키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귀족임을 암시하는 검(劍)을 차고 있고, 자부심이 넘쳐 보인다.​​ 이 자화상은 그가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그린 약혼 기념 초상화 '인동덩굴 아래의 예술가 그의 첫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 추구했던 삶을 성취했음을 보여준다.​

루벤스와 카라바조도 역시 자신의 삶과 성정이 드러나는 작품을 제작했다. 카라바조는 거리에서 가난과 병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 그는 성모와 성자 등을 로마에 사는 평범한 서민으로 등장시켜 천박하고 상스럽다고 혹평과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수백 년 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 그는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하고 조소처럼 된 형상을 어둠 속의 한줄기 빛으로 묘사하였다. 이후 카라바조의 스타일은 프란스 할스와 렘브란트 그리고 벨라스케스까지 바로크 거장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카라바조는 ‘미술계의 이단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서 근대 사실주의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예술은 작가의 경험과 선택을 거쳐 표출되는 과정의 산물이기 떄문이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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