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로 사회생활 제약” HIV 감염, 장애로 봐야할까

“차별로 사회생활 제약” HIV 감염, 장애로 봐야할까
레드리본인권연대는 17일 오전 대구시 수성구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HIV 감염인의 장애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레드리본인권연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을 장애로 인정해달라는 인권단체의 목소리가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감염된 순간부터 평생을 차별 받으며 힘들게 생활해야 하지만 신체적 손상이 없다는 이유로 장애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도 사회적 제약을 장애 개념의 하나로 보고 장애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데 무게를 실었다. 

지난 17일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HIV 환자들의 호소가 울려 펴졌다. 이 날은 HIV 감염인 A씨가 대구 남구청장을 상대로 낸 장애등록 반려처분 취소 소송 첫 변론기일이 열리는 날이었다. HIV 감염인 인권단체인 레드리본인권연대는 “HIV 감염 장애등록을 촉구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레드리본인권연대에 따르면 70대 HIV 감염인 A씨는 지난해 10월 대구 남구 한 행정복지센터에 장애인 등록을 신청했으나 장애 진단 심사용 진단서가 없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이에 A씨는 지난 1월 HIV 감염을 장애로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장애 진단 심사용 진단서는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에 정해진 15개의 장애 종류·기준에 따라 발급된다. 하지만 현행 장애 정도 판정 기준에는 HIV 감염으로 인한 장애 인정 기준이 없다. 인권단체들은 10여년 전부터 HIV 감염을 장애 기준에 포함시켜 달라고 정부에 요청해왔다. 

A씨는 “HIV 진단 이후 삶이 파탄 났다”며 “15년 전 요리사로 일해 월 250만원씩 벌었지만 HIV 진단을 받은 이후 월 소득이 기초생활수급비를 초과한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장애인으로 등록되면 국가 정책의 대상이 돼 공공요금 감면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장애수당, 일자리 지원 등 복지서비스를 통해 자립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레드리본인권연대는 “HIV가 여러 질병을 동반함은 물론, HIV 감염인의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나 이들을 위한 돌봄·요양 지원은 전무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적 차별로부터 야기되는 감염인의 정신질환 위험도가 매우 높다”며 “감염인을 사회로부터 분리·단절시키고 사회생활에 제약을 갖게 해 ‘사회적 장애’ 상태에 놓여 있다”고 피력했다. 

영국·일본 등 장애 인정…“장애 개념 되짚어야”

HIV는 인체의 면역기능을 파괴하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에이즈)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사람의 몸속에 침입하면 생체 면역세포들을 지속적으로 파괴해 면역력을 떨어뜨린다. 면역이 낮아지면 대사증후군 등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HIV·AIDS 감염엔 사회적 편견과 낙인이 따라붙는다. ‘포옹, 악수, 대화만으로 감염된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사회적 차별을 받기 일쑤다. 지난 2019년 질병관리청이 전국 10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자녀가 에이즈 감염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경우 해당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에이즈 감염인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없다’라는 조사 항목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각각 45.1%, 52,4%를 차지했다. 

문화적, 사회적으로도 배제된다. 취업은 물론이고 일자리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지난해에는 HIV 감염 진단을 받은 119 소방대원이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해 소송이 이어지기도 했다. 김선영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HIV 감염인들은 취업은 물론 의료적 차별도 심각하며 가족으로부터의 단절도 겪고 있다”며 “평균 연령대도 높아지면서 건강이 악화되는 분들이 많지만 이들을 지원해줄 수 있는 법적 장치는 부재한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현행법은 장애를 질환 유형이나 등급으로 정해 획일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문제”고 비판했다. 

해외에서는 국제연합장애인권리협약에 근거해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레드리본인권연대에 따르면 일본, 홍콩, 영국은 감염인을 법정 장애인으로 지정했다. 미국, 호주, 독일 등에서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을 통해 장애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국내에선 2019년 장애 종류에 포함되지 않는 뚜렛증후군 환자가 행정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사례가 있다. 당시 재판부는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에 뚜렛증후군이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더라도, 적용 대상에서 배제하려는 취지가 아니라면 가장 유사한 장애 유형을 적용하는 것이 장애인복지법의 취지와 평등 원칙에 부합하다고 판단했다. 

해당 판결 이후 정부도 장애 기준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21년 장애인복지법 하위법령을 개정하고 간신증후군, 정맥류출혈,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백반증, 중증 복시, 완전요실금, 뚜렛증후군 등을 겪는 환자가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전문가들은 장애의 개념이 ‘신체적 손상’을 넘어 ‘사회적 장벽’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윤화 한국장애인개발원 정책연구팀장은 “우리나라의 장애 개념은 의료적, 신체적 부분을 강조하다보니 다양한 질환들이 장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해외는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잣대로 두고 장애를 판정해 포괄적 정책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문화적 차별로 인해 소득을 갖지 못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최대한 장애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팀장은 “당장 장애등록을 위한 법적 개선이 어렵다면 장애인만큼 사회 장벽을 겪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득 보장 등의 복지서비스를 확대하는 방안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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