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 아닌, 그냥 나 [눈떠보니 K장녀④]

장녀 아닌, 그냥 나 [눈떠보니 K장녀④]
다큐멘터리 채널 인터브이의 K-장녀 테스트 빙고판.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을 여행자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비참한 여행자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인간이며, 위대한 여행자는 스스로 목적지를 선택하는 인간이다.” 한국의 장녀는 가족과 사회의 요구에 목적지를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삶의 여행길에 올랐다. 부모에겐 속 썩이지 않는 1등 자식이 돼야 했고, 동생에겐 든든한 부모 노릇을 해야 했다. 그렇게 위대한 장녀가 되는 대신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위대한 여행자’에 가까울까, 아니면 ‘비참한 여행자’에 가까울까. 쿠키뉴스 청년기자단은 맏이로 자란 2030세대 여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K-장녀(Korea+장녀)의 삶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혹시 K-장녀이십니까?”

최근 몇 년간 SNS에서 K-장녀의 특징을 나열한 밈(meme)이 쏟아졌다. 형태는 다양했다. 다큐멘터리 채널 ‘인터브이’에서는 장녀의 특징을 빙고 판에 빗대어 설명했다. 밈에서 말하는 한국식 장녀의 특징이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딸’과 ‘맏이’라는 역할 사이에서 느끼는 압박이었다. 모범 강박, 가족을 대상으로 한 감정 노동, 과한 책임감 등이 그 예시였다.

K-장녀 밈은 설움과 해학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2030세대 젊은 장녀들에게 K-장녀 담론은 자신들의 차별을 공유하는 수단이 됐다. 장녀를 ‘차분하게 돌아있는 크레이지 걸’에 비유한 한 트위터 유저의 글은 무려 22,600번의 리트윗을 기록했다. 공감의 기저에는 자기 삶이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윤지선(23)씨는 “누나로서 어렸을 때부터 양보를 강요받았다. 장녀라는 정체성이 타인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며 밈을 보고 K-장녀가 나만의 일이 아니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맏딸로서 당연하게 감내했던 희생을 담담하게 표현한 건 밈뿐만이 아니었다. 인식에 발맞춰 매체 속 장녀에 대한 서사도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여성, 특히 첫째 딸들의 희생은 당연한 운명처럼 그려졌다. 책임감과 압박에 시달리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결말은 결국 가부장제에의 순응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매체 속 장녀는 다르다. 압박을 이겨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장녀들이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올해 6월 개봉해 약 7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는 이민자의 관점에서 K-장녀의 특징을 그려냈다. 주인공이자 장녀인 엠버는 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부모의 희생에 부채 의식을 느끼고 그 기대치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이를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주인공 웨이드를 만난 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마주하고 가업이 아닌 자신의 꿈을 택한다.

2022년 전미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에리카 산체스의 자전적 소설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에서도 관념에 대항하는 딸이 등장한다. 독립하지 않고 가족을 부양하던 완벽한 멕시코 딸이었던 언니의 죽음 후 차녀였던 주인공은 장녀의 역할을 마주한다. 방황 끝에 집안일이 아닌 대학 진학을 선택한 주인공은 엄마를 향해 말한다. “난 언니처럼 되지 않을 거예요. 난 엄마를 사랑하지만 다르게 살고 싶어요. 집을 지키기는 싫어요. 학교에 가고 싶고 세상을 보고 싶어요.”

사회적 분위기가 변화하며 K-장녀 탈출을 행동에 옮기는 여성들이 나타났다. 변화는 사소한 결심에서 시작됐다. 타인이 나에게 부여한 장녀로서의 틀을 벗고 주체적인 삶을 살자는 결심이었다. 독립출판을 통해 자신의 차별과 결심을 알리려는 장녀도 있었다.

장녀 아닌, 그냥 나 [눈떠보니 K장녀④]
설날에 떠난 해외여행은 4명의 K-장녀들에게 나름의 반항이었다. 이선유씨 제공.

이선유(31)씨는 2021년 독립출판물 ‘92년생 K-장녀’를 발간했다. 고등학교 동창 관계인 4명의 장녀가 설 연휴 큰집이 아닌 블라디보스토크로 해외여행을 떠나며 느낀 점을 책으로 펴냈다. 이씨는 장녀로서 엄청난 희생을 요구받지는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부담과 압박이 있었다. “첫째 딸이니까 집안일을 도와야지” 장녀라는 이유로 지나친 책임감을 부여받았다. 의무는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다. 명절을 지내는 가족을 두고 떠나기가 미안했다.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행 허락도 받아야 했다.

여행에서 이씨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장녀로서 지나친 책임감을 안고 살았던 자신을 발견했다. 상처를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꿋꿋이 견뎠던 순간들이 불필요했음을 깨달았다. 이를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얽매는 스트레스와 관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문득 K-장녀였던 자신의 삶과 변화의 다짐을 책으로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는 젊은 장녀들에게 “타인 혹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나친 책임감과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라는 말을 전했다.

지금까지의 K-장녀 담론에서는 장녀의 차별과 압박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개인의 노력을 중시했다. 개인이 이를 자각하고 저항을 통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문화에 반항했을 때 얻는 비판도, 노력이 부족해 K-장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책임도 모두 장녀 개인에게 돌아왔다. 전문가들은 K-장녀의 근원에 있는 가부장적 문화를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영란 숙명여자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장녀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맏딸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가 떨치지 못하고 내면화한 가부장적 문화가 맏딸들에게 의무를 인식하게 했다”며 “가족 구성원 간 삶의 방향이 다르니 갈등은 당연하다. 이를 인정하고 서로가 각각의 자아를 가진 ‘독립된 주체’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SNS상의 밈이나 매체의 K-장녀 서사를 통해 장녀의 차별을 공유하고 공감할 순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장녀의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의 연대가 필요하다”며 “K-장녀는 여성들, 특히 모녀 관계를 통해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단면이다. 대항 담론을 통해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전했다.

박은지 쿠키청년기자 apples2000s@naver.com


그들이 말하지 못한 비밀 [눈떠보니 K장녀①]

덜 아픈 손가락 [눈떠보니 K장녀②]

부모의 부모가 돼야 했던 딸들 [눈떠보니 K장녀③]

장녀 아닌, 그냥 나 [눈떠보니 K장녀④]
Copyright @ KUKINEWS. All rights reserved.

쿠키미디어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