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아픈 손가락 [눈떠보니 K장녀②]

덜 아픈 손가락 [눈떠보니 K장녀②]
장녀들은 괴로워하면서도 가족의 정서를 돌본다. pexels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을 여행자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비참한 여행자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인간이며, 위대한 여행자는 스스로 목적지를 선택하는 인간이다.” 한국의 장녀는 가족과 사회의 요구에 목적지를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삶의 여행길에 올랐다. 부모에겐 속 썩이지 않는 1등 자식이 돼야 했고, 동생에겐 든든한 부모 노릇을 해야 했다. 그렇게 위대한 장녀가 되는 대신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위대한 여행자’에 가까울까, 아니면 ‘비참한 여행자’에 가까울까. 쿠키뉴스 청년기자단은 맏이로 자란 2030세대 여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K-장녀(Korea+장녀)의 삶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화목한 가정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개인보다 가족을 우선시했다. 이런 가족주의 인식 아래 5060세대는 가족을 돌보고 부양했다. 희생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날의 희생자는 2030세대 K-장녀다. ‘우리도 다 했던 일’이라는 생각은 2030세대 K-장녀에게 또 다른 희생을 요구했다.

2030세대 K-장녀들이 가정에서 주로 수행하는 역할은 ‘정서적 돌봄’이다. 공동체 해체, 냉소주의 등으로 가족의 기능 중 보호의 기능이 축소되고 정서적 지지 기능의 중요성이 커졌다. 사회가 개인화되면서 가족 내 친밀감과 유대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난 것이다. 의지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맏딸은 그렇게 탄생했다.

2023년 한국리서치에 따르면 자녀·육아인식조사 결과 국민의 59%가 아들보다 딸을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딸이 아들보다 정서적 교감이 수월하다는 인식이 이유로 꼽힌다. 딸이 부모와 감정을 잘 공유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된 결과다. 그중 첫째는 다른 자녀보다 성숙하고, 책임감이 크다고 여겨져 가족들이 의지하기 쉽다. 가정에서 정서적 돌봄을 요구받은 K-장녀들은 이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타지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고 있는 이수빈(23)씨는 어머니의 불만을 들어주는 게 일상이다. 이씨의 어머니는 동생과 다투고 나면 딸인 이씨에게 전화를 건다. 이씨는 이모 욕을 늘어놓는 어머니의 편을 들며 호응해야 한다.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어머니가 서운해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머니와 이씨와 말다툼하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씨는 어머니의 감정이 다 풀릴 때까지 전화를 끊을 수 없다.

이씨는 어머니가 정서적으로 자신에게 의지한다고 느낀다. 이씨의 어머니는 평소에 “딸이니까 얘기하지, 누구한테 얘기하겠냐”는 말을 자주 했다. 이씨는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받아들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엄마를 돌보나’라는 생각도 자주 한다.

4인 가족 중 장녀인 정지희(25)씨는 가족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어느 날은 어머니, 동생과 셋이 쇼핑몰에 갔다가 다툼이 생겼다. 동생은 “언니 옷만 사주고 내 것은 안 사준다”며 불만을 표현했고, 어머니는 “네 옷은 평소에 많이 사지 않느냐”고 받아쳤다. 집에 돌아온 뒤 정씨의 어머니와 동생은 각자 방에 들어가 버렸다. 정씨는 각자의 방에 찾아가 입장에 공감해 주었고 방에서 나와 대화해 볼 것을 유도했다. 정씨는 “가족들이 예민해져 있으면 나도 같이 감정적으로 변한다”며 “그런 상황에서 심하게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씨는 가족 내 갈등은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정씨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이 나를 우리 집의 기둥이라고 불렸다”면서 “가족 내에 문제가 생기면 부모님과 더불어 장녀인 내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분위기가 나빠졌을 때도 빨리 가족들을 안정시켜야 마음이 안정됐다. 또 정씨의 부모님은 동생보다 정씨에게 ‘가족의 일을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장녀가 가족의 정서적 돌봄을 부담하는 것은 가족과 장녀 개인 모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정민 서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가족과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고민을 들어주고 갈등을 해결해 주길 바라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하지만 가족 구조상 위계에 맞지 않게 과도하게 요구한다면 불건강한 가족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장녀는 이런 일을 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압하거나 타인 위주의 관계를 맺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아현, 안재현 쿠키청년기자 ahkim12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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