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마약이라더니… 돌변한 WHO

지난해 게임을 질병 코드로 등록한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은 지난 3월 21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집에 있는 동안 음악 감상, 독서 또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WHO는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지난 1일부터 '게임을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자(#PlayApartTogether)'는 캠페인을 시작하며 게임을 장려했다.

WHO의 이러한 행보는 지난해와 사뭇 다르다. 2019년 5월 WHO는 만장일치로 게임과몰입을 질병이라 규정하며 국제질병분류 제11차(ICD-11) 개정판에 게임이용장애 코드를 부여했다.

이에 국내 게임 업계는 뚜렷한 근거없이 게임을 질병의 원인, 중독유발물질로 단정짓기에는 이르다며 크게 반발했다. 당시 학회, 협회, 학계 등 89개 단체는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를 설립했으며 문화체육관광부는 게임중독 질병코드 국내도입을 반대한다며 WHO에 이의를 제기했다.

공대위는 "게임은 소중한 문화이며 4차 산업혁명을 여는 창임에도 불구하고 현대판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며 “정부가 사회적인 합의 없이 한국표준질병분류(KCD) 개정·도입을 강행할 시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강조했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게임 과몰입 문제를 흔히 중독이나 질병이라고 표현하는데 게임에 굉장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건 정말 잘못된 일이다. 오히려 게임은 4차 산업 시대, 5세대 이동통신 시대에 있어서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즐기고 향유해야 하는 문화이자 레저”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편 게임 업계는 WHO가 뒤늦게라도 게임의 순기능을 재조명한 것에 대해 반기는 분위기다. 다수의 게임 개발사들이 PlayApartTogether 캠페인에 적극 참여 중이다. 

현재 액티비전 블리자드, 라이엇 게임즈, 유니티, 트위치 등 글로벌 게임 관련 업체 18곳을 비롯해 지난 7일 기준 50개 이상의 기업들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캠페인에 참여한 기업들은 자사의 인기 게임을 무료로 배포한다거나 게임 내 이벤트 및 보상, SNS 활동 등을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WHO의 행보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각도 있다. 한 게임 업계 관계자는 "WHO는 게임을 질병 취급하더니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유행)이 발생하자 게임을 권장하고 있다. 질병을 질병으로 잡는다는 취지인가?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WHO는 게임의 질병화가 성급했다는 것을 인지해야한다"고 말했다. 

한국게임학회 또한 "WHO가 게임의 가치를 인식하고 게임을 적극활용하는 캠페인에 동참한 것을 환영한다"며 캠페인을 지지하면서도 "작년 게임 질병코드 도입 결정으로 전세계 게임인들이 심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에 WHO가 게임계에 도움을 청했을 때는 최소한 유감 표명이라고 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 위기를 기회로

WHO는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코드에 등록함으로서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한 국내 정서에 기름을 끼얹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WHO는 게임의 과도한 이용 행태를 질병으로 등록한 것이지 게임 자체를 질병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다. 즉 WHO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게임을 권장하고 있어도 "게임에 일정 수준 과몰입하게 되면 질병으로 볼 수 있다"는 기존 입장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게임이용장애 코드는 2022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 이는 '권고사항'으로 WHO 회원국이라고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내 같은 경우 보건복지부에서 게임이용장애의 공식 질병 규정에 강력히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2025년에 개정될 '한국 질병 분류 코드(KDC)'에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 

박 장관은 WHO의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록에 대해 “권고라는 건 일종의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라며 “해당 사항은 국무조정실을 중심으로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꾸준히 논의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게임 업계는 코로나 정국이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꿀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게임 업계는 코로나19 확산 방지 및 의료계 지원을 위해 성금 기부, 스트리밍을 통한 기부 릴레이 등으로 '선한 영향력'을 선보이며 이미지 쇄신에 나서고 있다.

NC, 넷마블, 넥슨 등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코로나19 확대 방지 및 피해 복구 등을 위해 20억 원의 성금을 기부했다. 컴투스는 감염병에 노풀되기 쉬운 신생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머너즈 원: 천공의 아레나'의 전 세계 인플루언서들과 유저들이 함께 한 '릴레이 기부 챌린지' 이벤트를 진행했다. 

e스포츠 선수 및 구단들 또한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손발 벗고 나서고 있다. 리그오브레전드 프로게이머 T1 '페이커' 이상혁, 젠지 e스포츠 'BDD' 곽보성을 비롯해 많은 선수들이 기부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T1은 소속 프로게이머, 콘텐츠 크리에이터 등과 함께 '릴레이 기부 스트리밍'을 진행했으며 한화생명e스포츠는 '방구석 클릭 챌린지', '한화생명e스포츠 카트라이더 올스타전' 등을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 동참과 취약 계층 지원을 장려한 바 있다. 

국내 게임 업계가 게임의 부정적 이미지 탈피를 위해 자극적인 콘텐츠보다는, 교육용 게임 등의 다양한 사회적 콘텐츠를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게임학회는 "게임은 인간사회의 충실한 공간적 실현이다"라며 "물리적 공간에서 거리를 두되 '대결, 화합, 소통, 갈등, 해결'과 같은 사회적 교류를 사이버 공간에서 가능하게 하는 게임의 순기능을 이용해 사회적 거리두기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정부 역시 WHO의 결정을 참고해 코로나 극복 활동을 적극 전개해야 한다. 과거 문체부는 게임의 순기능을 학습에 살려낸 G러닝(게임 기반 학습) 온라인 프로그램을 각급 학교에 도입해 왔지만 어느 순간 그 성과는 사라지고 말았다. 초중고의 온라인 수업이 혼란을 거듭하는 지금 문체부, 교육부, 과기정통부 같은 정부 부처는 온라인수업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육용 게임을 수업에 적극 활용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내 메이저 게임사들은 그동안 소흘히 해왔던 초중고 교육용 게임이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게임을 적극 개발해 사회적으로 기여하기를 촉구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게임은 마약이라더니… 돌변한 WHO

실제로 폴란드는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교육용 '마인크래프트' 서버를 이용할 수 있는 사이트 Grarantanna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는 마인크래프트 서버 이외에도 게임 제작 대회 '게임 잼', 온라인 TTRPG(테이블 토킹 역할수행게임), 폴란드 역사·지리와 관련된 퀴즈 게임, 수학 퍼즐, 웹세미나 등이 포함돼 있다. 

lunacyk@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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