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페스’ 논의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RPS 논란 진단②]

‘알페스’ 논의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RPS 논란 진단②]
20세 여대생으로 설정된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아이돌의 인권 보호를 위한 움직임인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역습)인가. ‘알페스’로 통칭되는 RPS(Real Person Slash·원전을 재해석한 픽션 가운데 실제 인물을 로맨스 관계로 풀어낸 창작물)를 둔 갑론을박이 뜨겁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딥페이크뿐 아니라 ‘알페스’를 디지털 성범죄에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이런 공론화가 ‘n번방 사건’ ‘이루다 논란’ 등에 대한 보복적 담론에 가깝다는 비판도 나온다. 남성이 주로 가해자인 사건이 연이어 불거지자, 여성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써 RPS 반대 논의를 내세운다는 지적이다.

최근 RPS가 논쟁의 장으로 소환된 배경은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를 향한 성착취 논란과 연관이 있다. ‘이루다’에게 성적 모욕을 주는 대화가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놀이처럼 번지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에 ‘실제 인물이 등장하는 RPS가 더욱 문제’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RPS를 n번방 사건과 등가로 취급하는 시도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RPS 처벌을 요구한 누리꾼은 ‘RPS가 n번방 같은 권력형 성범죄를 떠올리게 한다’고 주장했다. 하 의원도 RPS를 “제2의 n번방 사태로 칭할 만하다”고 말했다.

‘알페스’ 논의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RPS 논란 진단②]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오른쪽)과 이준석 전 최고위원이 남성 아이돌을 소재로 한 RPS·섹테(섹스테이프) 제조자 및 유포자 수사의뢰서를 영등포경찰서에 접수했다.
그러나 각계 전문가들은 RPS와 n번방 사건을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은의 변호사는 “논리의 비약”이라고 짚었다. 이 변호사는 “n번방 사건은 피해자를 협박해 성폭행·성희롱하고 이를 영상물로 송출해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조직적 범죄이자 실체적인 범죄가 복합된 사건”이라면서 “실제 인물을 투영해 표현의 자유 범주를 벗어난 수위의 성 묘사를 하는 창작물을 새로운 유형의 불법행위로 볼 수는 있지만, n번방과 같은 수준으로 평가돼야 한다고 판단하긴 어렵다. 이런 등가 평가로 n번방 사건이 가볍게 취급될까봐 우려된다”고 말했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피해 정도를 나누는 게 조심스럽긴 하지만, 피해 회복의 불가능성을 비롯해 피해자가 느끼는 여러 어려움들을 고려했을 때, (RPS로 인한 성적 모욕감을) n번방 등 촬영물을 이용한 성폭력과 완전히 등치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고 봤다.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도 페이스북에서 “오래된 강간문화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만나 열린 ‘소라넷-디지털 성범죄-n번방’ 이후의 ‘이루다 사태’와 ‘알페스’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제2의 n번방’이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온라인에선 RPS 반대 논의가 성별대결, 구체적으로는 여성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손심바, 비와이 등 남성 래퍼를 중심으로 ‘RPS는 성범죄’라는 주장이 나오자, 키디비는 “언제부터 한국 힙합이 성희롱에 이렇게 예민했지? 입 다 다물고 있었던 거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앞서 그를 성적으로 모욕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래퍼 블랙넛은 별다른 자숙 없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실제 강간과 강간 모의가 일어났던 소라넷과 n번방보다 ‘알페스’가 더 악독하다는 말. (중략) 성 평등을 얘기할 때마다 저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번번이 발목을 잡는다”며 분노했다.

건강한 논의를 위해선 제대로 된 의제 설정이 우선돼야 한다. 익명의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불법성이 확실한 딥페이크는 물론이고, RPS 역시 아티스트가 피해를 호소하면 당연히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며 “이 문제가 성별 대결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짚었다. 이 변호사도 “성별대결 문제로 볼 게 아니라 온라인 디지털 문화 속에서의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와 원칙의 문제”라면서 “연예 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지켜야 할 선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폭력이 이슈가 됐고, 그 중에서도 촬영물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활발했다”면서 “앞으로는 확장된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성적 괴롭힘을 유형화해 성폭력으로 호명하고, 이와 더불어 정책적·입법적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이루다 페이스북,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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