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연대의 힘으로 달려가는 기분 좋은 질주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시작부터 숨이 턱 막힌다. 빨간색과 흰색으로 이뤄진 유니폼을 입은 고졸 여사원들이 모여 초를 재가며 커피를 빠르게 타는 연습을 한다. 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한 사무실에서 재떨이를 가는 것도, 담배 심부름을 하는 것도 당연히 그들의 몫이다. 8년이 되도록 승진 기회가 없어 사원에 머무르는 동안 후배인 대졸 남사원이 먼저 승진하는 걸 눈 뜨고 지켜봐야 한다. 같은 팀 대졸 여직원이 회의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빼앗아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햄버거를 사다 나른다. 1995년 어느 날 평화로운 삼진그룹의 풍경이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은 회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졸 사원의 모습을 그렸다. 토익 600점을 넘으면 대리로 승진시켜준다는 공고를 본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 등 삼진그룹의 고졸 사원들은 영어토익반에 모여 공부에 매진한다. 어느 날 자영은 그룹 회장의 아들인 오태영 상무(백현진)의 짐을 옮기기 위해 방문한 공장에서 폐수가 방류되는 걸 목격한다. 유독물질인 페놀이 포함되어 있다는데 검사한 수치가 안전하다고 나온다. 하지만 동네를 돌아보다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자영이 유나, 보람과 함께 검사 결과가 됐다는 조작됐다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 나선다.

영화는 쉽게 지나칠 법한 아주 작은 사건이 회사를 뒤집는 커다란 폭풍이 되는 과정을 흥미롭고 유쾌하게 그렸다. 우연한 목격에서 시작된 의심의 씨앗은 호기심과 애사심을 갖춘 인물들의 무시무시한 실행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다. 여러 번의 고비를 마주치고 포기할 위기에서 다시 이들을 일어서게 하는 건 바로 옆에 있는 동료다. 성격도, 관심사도, 목표도 완전히 다르지만 곁에서 힘을 주고 함께하는 동료들 덕분에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순수한 연대의 힘이 이들을 어디까지 도달하게 하는지 지켜보는 즐거움이 상영 시간 내내 떠나지 않는다.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사건을 파고들던 세 사람이 넘어지고 좌절하고 함정에 빠지게 하는 빌런의 정체가 단단한 회사 조직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학력과 성별로 인한 차별, 수직적 관계로 이뤄진 경직된 조직문화 등 입사 전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이들을 괴롭히는 것들이 앞으로 나아가길 번번이 방해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아무리 토익 600점을 넘어 승진을 해도 다녀야 할 회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인적인 욕망이 영어 공부에 투영된다면, 회사의 일원으로 회사를 지키고 싶다는 욕망은 페놀 사건으로 드러난다. 회사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 회사를 위험에 빠뜨리는 딜레마에서 연이어 현명한 선택을 하는 언뜻 비현실적인 장면들은 놀라움을 넘어 묘한 쾌감을 불러온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회사로 시작해서 회사로 끝나는 영화다. 주인공들이 퇴근한 이후의 모습이나 각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조명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특별하게 그리지 않는 점이 영화의 진짜 주제와 맞닿아있지 않을까. 2020년의 인턴사원부터 1995년에 머물러 있는 꼰대 임원까지 각자의 감상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흥행에 성공할 상업영화의 조건을 갖췄다.

오는 21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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