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조정래 감독 “‘소리꾼’ 이상의 이야기 만들 자신 없어요”

조정래 감독 “‘소리꾼’ 이상의 이야기 만들 자신 없어요”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지난 1993년 개봉한 영화 ‘서편제’(감독 임권택)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재학 중이던 영화학과를 자퇴할까 고민하던 조정래 감독은 ‘서편제’를 보고 둔기로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서편제 2’ 시나리오를 적어 레포트로 제출했고 평소 좋아하지 않던 판소리에 빠졌다. 판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사서 수백 번, 수천 번 들어 외울 정도였다. 장기자랑이 있으면 판소리를 불렀고 군대에서 포상휴가까지 받았다. 이후 직접 북을 치는 고수(鼓手)로 오랜 기간 활동해왔다.

최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조정래 감독은 “음악과 서사가 한꺼번에 왔던 것 같다”고 했다. 영화 ‘귀향’으로 알려졌지만, 그에겐 오랜 기간 ‘서편제’의 영향 아래 있었다. 1일 개봉하는 영화 ‘소리꾼’은 ‘서편제’ 이후 달라진 삶을 살던 그가 “언젠가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작품이다.

“북을 치며 공연자로 활동하면서 돌잔치와 웨딩, 다큐 등 500편이 넘는 영상을 찍었어요. ‘소리꾼’은 그 과정에서도 계속 존재했던 영화예요. 전작인 ‘귀향’이 제 사명 같은 영화라면, ‘소리꾼’은 계속 품고 있던 소명이에요. 솔직히 자신이 없었어요. 원래 존재하는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노력한 게 아니거든요. ‘소리꾼’의 이야기가 제 좌충우돌 인생 속에서 같이 성장했던 것 같아요. 결혼하면서 학규의 심정도 알게 됐고, ‘귀향’이라는 자식을 낳으면서 성장했죠. 그러다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 아닌가 싶어요.”

조정래 감독은 ‘소리꾼’ 준비 과정에서 “넌 왜 그렇게 안 될 것 같은 소재만 자꾸 하냐”는 얘길 들었다. ‘귀향’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는 건 당시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고, 판소리 역시 대중적인 소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처음엔 ‘소리꾼’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놧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창작의 영역이잖아요. 자식을 낳는 것과 같아요. 하지만 그러기엔 제가 정신적으로 덜 자란 것 같았어요. 학규는 왜 그래야 했는지, 심청이는 인당수에 왜 빠졌는지, 학규가 눈을 뜨는 게 내가 뜬 건지 분석이 안 되더라고요. 단순히 전 국민이 다 아는 효(孝)에 관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길었어요. 고군분투하면서 제 머릿속에 담고 있으니 이야기가 자라기 시작해서 어느 순간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빠른 속도로 시나리오 썼어요. 영화를 찍고 후반 작업을 하면서 또 업그레이드됐고요. 영화를 보니까 못 보던 게 또 보여서 놀라기도 했어요. 이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그분들이 제 멘토라고 생각해요.”

‘소리꾼’은 납치당한 아내 간난(이유리)를 찾는 학규(이봉근)의 이야기가 판소리 심청가의 이야기와 함께 진행된다. 심청가의 탄생기를 서술하는 것 같은 영화 속에서 학규의 현실과 학교가 내는 소리의 비현실이 교차한다. 조 감독은 다른 판소리와 달리 심청가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심청가는 아비가 눈을 뜨게 하려고 효녀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고 교과서에서 배우잖아요. 과연 그게 전부일까요. 전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엄청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찾았어요. 판소리 12마당 중 현재 다섯 마당이 남아있는데 적벽가는 삼국지에서, 수궁가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 흥부가는 형제의 우애에서 가져온 이야기에요. 춘향가는 누군가 작정하고 쓴 창작물 같았고요. 심청가는 달랐어요. 인신 공양에 관련된 설화들이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고요. 그리스 신화나 마블 영화처럼 심청가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관이 느껴졌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는 스토리는 어느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테마고, 눈을 뜬다는 건 해탈의 느낌이 있어요. 자신이 선택한 희생을 통해 일종의 구원 같은 메시지가 녹아있고 그걸 추적하는 이야기 같더라고요. ‘소리꾼’에서 중요한 건 한 광대가 도대체 이 이야기를 왜 만들었으냐 하는 거예요. 결국 학규의 죄의식에서 시작된 거죠. 아내를 찾아가면서 얘기가 진화하게 되고 공동창작의 영역에 들어가요. 당시 백성들의 이야기를 대표하는 사상들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 속에는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를 벗어나서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과 무엇이 행복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있다고 봤어요.”

조정래 감독은 일본에서 겪은 일을 배경으로 다음 숙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일본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 족과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아시아 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꼭 영화를 쓰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연출까진 할 수 없을 것 같아 시나리오만 쓰겠다는 다짐을 설명했다. 앞으로 판소리 영화를 다시 만드는 건 힘들 것 같다는 고백도 남겼다.

“제가 ‘소리꾼’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힘들기도 하지만 이 이상의 영화를 만들 자신이 없어요. 잘 못 쓰지만, 글은 계속 쓰고 싶어요. ‘소리꾼’에는 저의 모든 걸 녹였어요. 너무 오랫동안 만든 영화라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고, 개봉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bluebell@kukinews.com / 사진=리틀빅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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