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 실화와 영화 사이, 영화는 영화일 뿐일까

'그린북' 실화와 영화 사이, 영화는 영화일 뿐일까

'그린북' 실화와 영화 사이, 영화는 영화일 뿐일까실화를 기반으로 재창작한 영화들은 전 세계 어딜 가나 인기 콘텐츠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 혹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놀랍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일 자체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기기 때문이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그린 북’(감독 피터 패럴리)또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다. 백인 운전수 토니 발레롱가와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미국 투어 이야기를 그린 ‘그린 북’은 인종차별이 일상이던 1962년,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우정에 대해 다룬다.

‘그린 북’은 당시 흑인들이 여행하거나 다른 도시로 갈 때 사용하던 필수 여행책자였다. 이유인즉슨, 당시 흑인에게는 서비스를 하지 않는 식당이나 주유소 등이 즐비했으며 그린 북은 흑인들이 방문해도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업소를 다뤘기 때문이다. 토니 발레롱가는 그런 시대에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돈 셜리는 백악관에도 초청되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지만 인종차별로 유명한 미국 남부 투어에는 보디가드가 필요하다. 결국 토니 발레롱가는 돈 셜리의 보디가드 겸 운전사가 된다.

하지만 토니 역시 인종차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득권 백인이다. 그는 돈 셜리에게 고용됐음에도 불구하고 돈 셜리에 대한 거부감을 떨치지 못한다. 하지만 돈 셜리가 투어 기간 동안 겪는 차별을 옆에서 보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가며 나중에는 토니 스스로 돈 셜리의 대변자가 된다. 이후로도 50여년간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이 지속됐다는 메시지를 끝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는 개봉 직전 실제 모델인 돈 셜리 유가족들의 항의 때문에 구설수에 휘말리게 된다. ‘그린 북’의 제작자는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인데, 돈 셜리의 형인 모리스 셜리는 닉 발레롱가에게 영화 제작에 관한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밝힌 것이다. 더불어 영화와 달리 두 사람은 돈 셜리 생전에 거의 교류가 없었으며, 모리스 셜리는 “내 동생은 토니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토니는 직원이었고 운전사였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닉 발레롱가는 즉시 해명에 나섰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구였으며, 돈 셜리의 유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아 돈 셜리의 친구와 연락 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명한 것이다. 또 토니 역을 맡은 비고 모텐슨은 “해당 내용은 돈 셜리 유족 측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며, 유족들은 돈 셜리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또 “유족들은 돈 셜리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며, 이들이 오히려 원한관계였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그린 북’이 미국 프로듀서 조합상(PGA) 최우수 작품상 수상을 거머쥔 가운데 영화에 얽힌 이권을 유족들이 탐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있다.

하지만 영화 제작진의 해명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그린 북' 논란 이후 토니 발레롱가가 2015년 9.11 테러와 관련 인종차별 발언을 했음은 물론, 감독인 피터 패럴리는 20년 전의 성기 노출사건이 재조명됐기 때문이다. 주연 배우인 비고 모텐슨의 경우 지난해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한 것이 드러나 재차 사과했다. 이렇듯 영화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총체적으로 영화의 훌륭함과는 상관없이 질적으로 낮다는 뉴스만 연이어 부각되니 관객들의 눈도 점점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국내 영화에도 ‘그린 북’과 비슷한 사례는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암수살인’(감독 김태균)은 2007년 부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유족에게 동의는커녕 사전 언질도 하지 않아 유족 측이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내는 등 잡음을 빚었다. 결국 영화의 투자배급사인 쇼박스 측과 유족 측이 개봉 직전 극적 합의를 해 개봉에는 차질이 없었으나, 해당 이슈가 모객에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사실이다. 

배설 장군의 후손들인 경주 배씨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2014년 9월 경북 성주경찰서에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김한민 감독과 각본가 등을 고소했다. 당시 비대위는 2014년 15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명량'에서 배설 장군이 왜군과 내통하고 이순신 장군의 암살을 시도하는 등의 장면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2015년 11월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30일 "영화 '명량'은 허구를 전제로 한 창작물인 만큼 사자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무혐의를 선고했다.

흔히 쓰는 말로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현실’이라는 어구가 있다. ‘그린 북’ 이슈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훌륭하다는 것이다. 내달 열리는 제 91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물망에 오른 것은 물론 관객들의 극찬을 받고 있다. 영화 자체가 주는 아름다운 교훈에도 불구하고 그 제작자들이 영화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이 과연 영화와 현실을 분리해 볼 수 있을까. 과연 영화는 영화일 뿐이며, 현실은 영화와 분리해야 할까.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는 창작자를 기대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일지 한 번 쯤은 짚어볼 일이다.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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