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종필 전 총리, 그는 누구인가

3김(金) 트로이카 주축…9선 의원 지낸 ‘풍운의 정치인’

고(故) 김종필 전 총리, 그는 누구인가김종필(JP) 전 총리가 2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김 전 총리는 1926년생이다. 고향은 충남 부여다.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학창시절 그는 한학자인 아버지에게서 붓글씨를 배웠다. 글을 쓰기 싫어 도망쳤다가 밤늦게 돌아오면 아버지는 밥을 먹인 후 글쓰기를 마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림도 곧잘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보령에서 소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그만뒀다. 광복 후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 사회교육과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지난 1971년~1975년, 1998년~2000년에 걸쳐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63년 6대 국회부터 의정활동을 시작해 9선 의원을 지냈다.

김 전 총리는 고(故)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꼐 ‘3김(金)시대’를 이끈 주축이다. 그는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 핵심 브레인으로 이른바 ‘혁명공약’을 기초했다.

입대 후 군 생활을 하다 항명 파동으로 중령 제대했다. 그로다 군사정변 성공 후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을 지냈다. 중정부장 재직 중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1961년 잡지사 ‘사상계’ 동인이던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사 사장 장준하를 취조했다.

1963년 예편 후 민주공화당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 창립을 주도했다. 공화당 창당 후 그는 당 의장에 선출됐다.

그는 한일협정 실질 교섭도 담당했다. 협상 내용은 일명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대일 청구권이 핵심쟁점이었다. 협상 타결 후 이를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있어났고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이어졌다.

김 전 총리는 후일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지만 이듬해 사퇴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후 물러난다는 선언을 하면서 그는 김영삼·김대중·이철승 등과 차기 주자로 떠올랐다. 박정희 견제를 받자 그는 당원을 사퇴하고 미국행을 택한다.

1970년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 1971년 3월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지냈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1990년초 통일민주당, 민주정의당과 3당통합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그는 내각제를 꿈꿨지만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신군부·하나회 등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불화로 민자당에서 물러났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1995년 자민련 총재에 추대 후 이듬해 4월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DJP연합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국민정부 총리로 임명됐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 대북 관계 등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갈등했고 2001년 결국 DJP연합은 붕괴된다.

2000년에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이듬해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소수야당 총재로 남게 됐다.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은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김 전 총리도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는 결국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송금종 기자 song@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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