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영업남] ‘숲속의 작은 집’ 예능의 탈을 쓴 수면 다큐

‘숲속의 작은 집’ 예능의 탈을 쓴 수면 유도 다큐멘터리


요즘 세상에 ‘취침 예약’을 걸고 TV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은 스마트TV의 보급으로 드라마-영화를 보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리모콘 대신 음성 인식으로 채널을 바꿀 수 있는 시대다. 아예 TV를 보지 않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TV 대신 휴대전화나 태블릿 PC를 이용해 좋아하는 콘텐츠를 원하는 시간대에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분위기다. TV 앞에 앉아서 본 방송 시간을 기다리거나, 밤늦게 TV를 보다가 혹시 켜놓고 잠들까 취침 예약을 걸어놓는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구시대 풍습 취급 받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6일 첫 방송된 tvN ‘숲속의 작은 집’은 TV에 아직 취침 예약 기능이 있는지 확인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1회를 끝까지 보고나니 전신 마사지를 받은 것처럼 온 몸이 나른해지고 참기 어려운 졸음이 쏟아졌다. 방송 다음날 올라온 ‘숲속의 작은 집’ 관련 기사에선 재미있다거나 웃겼다는 댓글은 찾기 힘들었다. 대신 ‘보다가 정말 잠들어버렸다’는 시청자들의 간증이 속출했다. 수면제 예능, 불면증 치료 예능, 자장가 예능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마치 자는 데 방해됐다는 듯 내레이션과 출연자 인터뷰가 시끄럽고 거슬렸다는 반응도 많았다.

‘숲속의 작은 집’이 처음부터 수면 유도 예능을 의도한 건 아니었다. 양정우 PD가 새 예능 아이템 회의 도중 본인이 즐겨하는 ‘오프 그리드’(Off Grid)를 언급한 것이 시작이었다. ‘오프 그리드’는 전기, 수도, 가스 같은 도시 인프라의 도움 없이 자연 속에서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삶의 태도를 뜻하는 용어다. 나영석 PD가 복잡한 도시를 떠나 농촌, 어촌에서 직접 밥을 해먹고 살고 싶다는 바람을 4년 전 tvN ‘삼시세끼’에 담았던 것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연 속에서 홀로 지내고 싶은 양정우 PD의 바람을 담아낸 프로그램이다.

‘숲속의 작은 집’이 전달하는 키워드는 고립, ASMR, 행복 세 가지다. 배우 박신혜와 소지섭이 출연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거나 대화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가져온 짐을 줄이고 2박 3일 동안 철저히 혼자 시간을 보낸다. 시끄러운 음악 대신 나른한 내레이션으로 빈 공간을 채운다. 유튜브나 SNS에서 들을 법한 새 소리, 장작 타는 소리, 물 소리를 꽤 긴 시간 동안 들려주기도 한다. 또 출연자들은 피실험자 A, B로 불리며 매일 몇 가지의 행복 실험을 진행한다. 갖고 있는 물건을 최소화하고 한 가지 반찬으로 밥을 먹는 ‘미니멀리즘 게임’을 하기도 하고, 아침 햇살에 일어나거나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를 담아오는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숲속의 작은 집’은 지금까지 방송된 그 어떤 예능보다 다큐멘터리의 색깔이 짙다.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예능을 넘어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영역에 들어선 느낌이다.

2년 전 첫 방송된 JTBC ‘한끼줍쇼’는 예능을 다큐멘터리처럼 찍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사전 섭외 없이 단순한 미션을 수행하는 실제 상황을 영상에 담는 것이 전부다. 일정 거리에서 출연자들을 쫓는 카메라의 시선을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연자들은 분량을 채우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끼거나 웃음을 억지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보여주며 ‘한끼줍쇼’가 아직 예능의 영역 안에 있음을 강조했다.

지난해 첫 방송된 JTBC ‘효리네 민박’도 비슷하다. ‘효리네 민박’은 스튜디오의 진행과 출연자 인터뷰를 없앴다. 대신 제주의 풍광과 사람들의 편한 모습을 끈질기게 담아내는 데 집중하며 다큐멘터리에 한 발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가 등장인물들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방송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짧은 스토리들을 완결성 있게 연결 짓는 편집 방식을 통해 ‘관찰 예능의 연장선’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드러내기도 했다.

‘숲속의 작은 집’은 더 과감한 방식으로 장르의 경계선을 넘었다. 대화와 스토리 대신 인물들의 순간적인 반응과 생각을 담아내는 데 집중했다. 카메라의 시선과 편집은 연출자의 의도를 최소한으로 담아냈다. 출연자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거나 움직이지 않는 관찰 카메라를 동원해 먼 거리에서 지켜볼 뿐이다. 방송을 의식해 억지로 사건을 만들어 내거나 웃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소리도 많이 덜어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성우의 내레이션, 자연의 소리, 혼잣말이 전부다.

[고독한 영업남] ‘숲속의 작은 집’ 예능의 탈을 쓴 수면 다큐

‘숲속의 작은 집’은 나영석 PD가 긴 시간 반복해온 여행 예능의 틀을 깬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나 PD는 짧은 기간 동안 국내 여행을 떠나는 KBS2 ‘1박 2일’에서 시작해, 동년배 배우들이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는 ‘꽃보다’ 시리즈,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밥을 해먹는 ‘삼시세끼’,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며 멤버들끼리 게임을 벌이는 ‘신서유기’ 등을 기획해 모두 성공으로 이끌었다. 지난해 새롭게 선보인 ‘신혼일기’, ‘윤식당’, ‘알쓸신잡’도 모두 여행 예능의 범주에서 새로운 콘셉트를 결합해 조금씩 변형시킨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숲속의 작은 집’은 집을 떠나는 여행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건 이전과 동일하지만, 나 PD는 더 이상 출연자들이 지내는 지역이 어딘지를 알려주지도 강조하지 않는다. 촬영이 진행되는 지역의 특징을 설명하거나 풍광이 얼마나 멋진지 보여주는 장면도 없다. 장소 따위는 프로그램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다.

대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지금까지의 여행은 한적한 곳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거나, 이국적인 도시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종류의 것이었다. 여행이 끝날 때쯤 낯선 곳이 준 경험과 스스로의 성장을 돌아볼 수 있게 했다.

‘숲속의 작은 집’은 경험보다는 의미를, 성장보다는 변화에 무게를 뒀다. 집에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느린 속도로 들여다본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들린다.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쉽게 지나쳤던 사소한 순간들이 생각보다 행복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이 같은 관점의 변화는 여행에 대한 태도마저 바꾼다. 지금까지 방송된 나 PD 예능 속 여행들은 잠깐의 달콤한 꿈을 꾸게 해줬다. 나도 저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보면 얼마나 좋을까, 저 풍경을 직접 보면 어떤 느낌일까를 생각하고 공감하게 했다. 당신도 여행을 떠나라고 부추기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하지도 못할 여행을 TV로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시청자들도 예능이 만들어내는 꿈은 지옥 같은 현실과 그 현실에 존재하는 나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서서히 깨닫는 분위기였다.

‘숲속의 작은 집’이 제안하는 여행은 다르다. 없는 살림에 비싼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멋진 곳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이동하지 않아도 된다. 일에 치여 시간을 내지 못하는 친구를 괴롭힐 필요도 없다.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만 바뀌어도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다. 예능을 보고 있는 내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숲속의 작은 집’ 역시 달콤한 꿈인 건 마찬가지다. 나영석 PD도 “시청자들도 단 하루, 이틀 만이라도 모든 걸 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힘들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실행하겠다는 거다.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이라도 줄 수 있으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분명 TV 속에서나 존재하는 환상이라는 점, 그 환상이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은 그대로다.

그럼에도 ‘숲속의 작은 집’이 한 번쯤 볼 만한 예능인 이유는 명확하다. 그 어떤 예능도 해내지 못했던 수면 예능 장르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예능을 보는 90여분의 시간이 한여름 밤의 꿈이면 어떻고, 지어낸 환상이면 어떤가. 피곤에 지친 금요일 밤 졸음과 숙면의 세계로 안내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숲속의 작은 집’에 채널을 고정시킬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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